[홍주환의 무방비 도시] 과연 태아의 생명은 여성의 삶보다 소중한가 – 영화 <4개월, 3주…그리고 2일>

임신과 출산이 삶의 감옥이 되는 사회에서 여성은 임신을 한 가비타와 임신을 두려워하는 오틸리아로 나뉜다.

무방비임신중단
|홍주환


#1.
낙태는 낯선 이슈가 아니다. 중‧고등학교를 지나며 윤리시간 혹은 토론시간에 자주 등장하던 주제 중 하나가 낙태였다. 학생들은 갈려 낙태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였다. 어느 시점부터 과연 태아를 생명으로 볼 것인가, 개인의 선택 등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그중 모두가 공감했던 점은 ‘아이의 생명은 중요하다’였다. 선생님도 말씀하시곤 했다. “어찌됐든 한 생명을 죽였다는 점에서는 부도덕한 면도 있다.”

#2.
1987년 차우셰스쿠 정권은 낙태를 정면 금지했다. 낙태를 실시한 자와 의사, 이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자는 중형에 허해졌다. 피임약, 피임도구도 전면 몰수했다. 출산율을 끌어올리겠다는 목적에서였다. 출산율이 폭발적으로 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다수의 여성이 원치 않는 아이를 출산했다. 반면 불법낙태를 시도한 여성도 많았다. 병원에 가서 낙태를 할 수 없는 그들은 허름한 호텔방에서, 창고 등에서 시술을 받았다. 비위생적인 시술 환경, 잘 세척되지 않은 의료도구들로 인해 감염돼 죽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일부는 시술받을 시기를 놓치고 절망한 상태에서 스스로 낙태를 시도하려다가 죽었다. 1989년 차우세스쿠가 혁명으로 죽기 전까지 약 50만명의 여성이 낙태시술 도중 사망했다. 영화 <4개월, 3주…그리고 2일>의 배경이다.

#3.
가비타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한 루마니아 여성이다. 그녀는 대학 기숙사 룸메이트인 오틸리아의 도움으로 한 호텔을 예약하고 낙태시술을 받는다. 낙태시술은 어려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의사가 그녀의 질로 긴 관을 삽입하고 태아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끝이다. 낙태는 성공하고 오틸리아는 멀리 떨어진 건물의 쓰레기통 속으로 태아를 버린다.
누구는 이 영화가 루마니아의 참혹한 현실이 가져온 낙태의 비인간적인 실상을 보여줬다고 썼다. 한 생명을 죽이는 과정 치고는 너무 단조롭기 때문인가. 또 누구는 이렇게 썼다. 이 영화를 보며 두 여성이 너무 태연해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이다. 영화가 끝나기 직전, 낙태시술을 받은 이후 회복한 가비타는 호텔의 식당으로 내려오고 배가 고프다며 오틸리아를 만나 밥을 먹는다.
이 영화를 보는 관점은 두 가지다. <4개월, 3주…그리고 2일>은 태아가 가비타의 몸속에서 살았던 시간이다. 그리고 <4개월, 3주…그리고 2일>은 가비타가 낙태를 생각했던 시간이다. 같은 사실을 뜻하는 듯 보이지만 전자와 후자는 전혀 다르다. 이는 태아와 가비타, 둘 중 누구의 시선으로 출산과 낙태를 바라볼 것이냐의 문제다.

#4.
#1의 토론 시간에 있었던 논의 중 문제점은 무엇일까. 여성의 생명과 삶, 몸에 대한 권리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는 점이다. 출산이 여성의 몸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며 여성의 생애주기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가 받아온 교육은 여성의 문제인 출산에서 여성을 배제한다. 출산과 가정이 주는 충만함을 강조할 뿐 이 사회에서 출산이 여성의 삶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이 낙태시술을 받지 못하고 출산을 했을 때 여성은 각종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 사회는 낙태를 죄악시하지만 모순적으로 출산을 한 미혼모에게도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임신한 여성은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고 출산 이후엔 경력단절을 경험해야 한다. 남녀평등을 말하지만 ‘그래도 아이는 여자가 키워야 한다’는 인식은 여전히 지배적이다. 여성의 몸은 출산을 겪으면 돌아올 수 없는 변화를 겪는다. 출산한 여성 중 적지 않은 사람이 혼자 아이를 돌보다 산후우울증에 시달린다.
누군가에게 삶이 파괴되는 것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태아의 생명이 여성의 삶보다 값지다는 정언명령은 없다. 영화를 보고난 이후 낙태에 죄의식이 없어 보이는 가비타를 두고 무책임하고 부도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이유다. 만약 손쉽게 태아의 시선만을 선택해 낙태는 죄악이라고 규정한다면 그 사회는 한 번도 여성의 삶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없는 곳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태아만이 생명이고 여성은 자궁일 뿐이다.
(낙태가 임신중절‧중단에 비해 흔히 쓰이고 자연스러운 것도 태아의 생명을 여성보다 우선시하는 인식과 유관하다. 임신을 그만두는 행위의 당사자는 태아와 여성 둘 다이지만 낙태라는 단어에서 여성은 찾아볼 수 없다. 대안적으로 임신중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5.
오틸리아는 가비타가 임신중단시술의 전반을 돕는다. 의사를 구하고, 의사를 호텔로 데려오고 심지어 시술의 값을 적게 쳐주는 대신 섹스를 하자는 의사의 부당한 요구도 받아들인다.
왜 오틸리아는 가비타를 헌신적으로 도왔을까. 단지 친구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부족하다. 오틸리아의 헌신적인 도움의 뒤에는 어떤 절박함이 있다. 이는 매우 당연하고도 치명적인 가비타와의 공통점에서 비롯된다.
바로 오틸리아는 가비타와 같은 여성이라는 점이다. 임신은 곧 오틸리아의 일이 될 수 있다. 오틸리아는 임신이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음을 항상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오틸리아는 그때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남자친구가 아니라 가비타임을 안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오틸리아의 생리주기를 잘 모른 채 섹스하고 어쩔 때는 귀찮다고 콘돔도 끼지 않으며 그녀가 ‘나 임신하면 어떻게 할 거야?’라고 물었을 때 ‘내가 다 책임질게’가 아니라 ‘그럴 일 없어’라고 먼저 말한다. 임신과 출산은 남녀의 일이지만 실제로 남녀에게 지어지는 의식과 부담의 차이는 불평등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은 가비타 뿐이야”라는 오틸리아의 말은 “남자친구는 나를 도와주지 않을 거야”라는 뜻이다. 이는 또 남자친구로 대변되는 남성 중심주의 사회가 임신한 여성의 삶을 도울 것이라는 신뢰가 존재치 않는다. 그리고 임신과 출산이 주는 파괴성을 홀로 감당해야 할 오틸리아에게 출산은 가비타를 돕다가 갈 수 있는 감옥보다 더한 감옥이다.

#6.
<4개월, 3주…그리고 2일>은 임신중단을 금지하자고, 합법화하자고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삶을 놓고 저울질하자는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임신중단은 단순히 찬성하고 반대하는 이상의 문제라고 말하는 영화다.
임신과 출산이 삶의 감옥이 되는 사회에서 여성은 임신을 한 가비타와 임신을 두려워하는 오틸리아로 나뉜다. 만약 진정 임신중단을 없애고 싶고 출산율을 높이고 싶다면 먼저 그 감옥을 없애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전국 가임기 여성지도’나 만드는 엘리트들과 ‘부인이 죄를 지었으면 권총으로 쏴죽이겠다’고 하는 1위 대선후보 캠프의 인사들, 여성의 삶에 무관심하면서 출산율이 적은 탓을 젊은 세대의 이기주의로 돌리는 자들에겐 그럴 의지가 전혀 없는 듯하다.
그들의 시각이 포괄하고 있는 임신 문제의 내부엔 여성이 없다. 임신중단을 합법화해달라는 요구에는 임신의 주체엔 여성이 있음을 인정해달라는 요구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사회는 임신중단 합법화의 맥락은 읽지 않은 채, 임신중단은 태아를 죽이는 부도덕한 짓이라는 강박에만 사로잡혀 있다. 누구는 이를 두고 ‘도덕적으로 완고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사실 ‘젠더적 무뇌 상태’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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