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S] 그럼에도 이퀄리즘이 아닌, 페미니즘이어야 하는 이유

다른 누구의 지적 때문이 아니라, 운동과 이론, 삶의 당사자들이 그 문제를 자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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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경

 

‘평등을 위한다면서 왜 평등주의(이퀄리즘)가 아니라, 여성주의(페미니즘)인가?’ 이는 페미니즘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말들 중 하나다. 성평등을 위한 운동이 ‘여성주의’로 불리는 것에 대해 어떤 이들은 의아함을, 더 많은 이들은 적대감을 드러낸다. 누군가는 ‘이퀄리즘’이라는 겉으로 보기엔 아주 매끈하고 점잖은 ‘평등주의’를 이야기한다. 진짜 평등은 페미니즘이 아닌, ‘이퀄리즘’에 있노라고.

“페미니즘은 여권 신장을 위한 운동이다”라는 진술은 참이지만, 페미니즘과 여권 신장이 서로 완전히 포개어 진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페미니즘이 여권 신장을 목표로 시작된 것은 맞다. 프랑스혁명 전후를 기준으로 한다면, 18세기 후반-19세기는 여전히 참정권은 남성에게만 주어져있고, 정치, 교육, 문화, 직업, 가족 등 삶의 모든 영역에 견고한 차별의 벽이 존재했던 시기이다. 또한 젠더 이분법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였다. ‘과학’과 ‘신’의 이름으로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질서를 교란하는 존재들이 ‘괴물’, ‘변태’, ‘정신병자’ 등 비존재의 영역으로 추방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젠더 이분법이 전제된) 여권의 신장으로서의 페미니즘이 제기되었다는 게 부자연스럽거나 문제적인가?

시대는 흐른다. 따라서 많은 것들이 변한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수많은 국가에서 여성 참정권이 성취되고 사회 전반에 여권 신장에 대한 논의와 제도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1960년대 이후로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흑인 민권운동, 여권운동, 게이운동, 반전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이 형성되었고 유럽에서는 68이 있었다. 페미니즘 내에서는 여전히 여권의 성취, 특히 제도적 영역에서의 여권 신장과 평등을 강조하는 이들도 있었고, ‘자유주의적인’ 흐름과는 달리 여성 문제에 대해 다른 접근을 모색하는 이들도 점차 늘어났다. 여성 억압의 핵심으로 재생산 영역을 지목하는 이들, 여성에 대한 멸시, 평가 절하에 대항해 ‘여성(성)’ 그 자체를 사랑하고 찬미하고자한 이들, 자본주의와 여성억압의 문제를 연결 지어 사고하고자 하는 이들 등 다양한 흐름이 나타났다.

‘자매’를 동질한 집단으로 묶는 운동은 강한 힘을 만들었고 또한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 하지만 ‘여성’은 인간이 아닌, 인간들이었다. 그 안에는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나이 등에서의 무수한 차이가 존재했다. 다른 누구의 지적 때문이 아니라, 운동과 이론, 삶의 당사자들이 그 문제를 자각했다. 그 이후로는 ‘여성’이라는 범주 내의 다양성, ‘여성(성)’이라는 범주에 대한 성찰과 고민 등이 이어졌다. ‘내부의 다양성’과 ‘범주의 비자연성’, ‘서구 중심적 페미니즘’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들이 등장했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또한 소수자 운동으로서 다른 수많은 소수자, 그리고 그들의 운동과 조우하면서 비판과 연대를 함께했다.

18세기 후반 시작된 페미니즘이 “여권 신장”을 목표로 했던 것은 역사적 맥락을 보았을 때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2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렀다. 페미니즘은 ‘현존하는’ 범주 내부의 다양성을 사유하는 동시에 범주 자체에 대한 성찰을 이어갔다. 서구사회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양한 국가들로 확산되면서 그 결은 더 다양해졌고,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새로운 비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현재의 페미니즘은 “(젠더와 섹슈얼리티, 성적 표현 등 다양한 결에서의) 성평등을 위한, 또한 이 세계의 무수한 소수자성이 교차하고, 다양한 소수자들과 함께 호흡하고 투쟁하는 운동/이론/담론/실천”이다. “여권의 신장”에서 “성평등”까지, 페미니즘은 그러한 역사를 담고 있는 상징 그 자체이다.

역사적 맥락을 이해했다면, ‘성평등을 위한다면서 왜 페미니즘이야?’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된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 이외에 이러한 역사와 맥락, 호흡과 언어를 온전히 담아내고 드러낼 수 있는 용어가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역사도, 투쟁도, 호흡도 담고 있지 않은 껍데기로서의 언어, ‘이퀄리즘’은 그것을 결코 ‘대체’할 수 없다. 페미니즘이나 여성혐오라는 언어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언어들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탈역사적이고 탈맥락적인 ‘현재의’ 시각에서 그 언어들의 표피만을 살피고, 그 언어들에 자신이 가진 편견과 무지를 부착하려는 이들, 문제는 바로 그런 ‘당신들’에게 있다. 어떠한 삶들도 포함하지 않은, 그렇기에 무던한 플라스틱 같은 언어로는, 결코 오랜 시간 동안 피와 땀, 숨과 삶을 머금으며 정제된 언어를 대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퀄리즘이 아닌, 페미니즘이어야 하는 이유다.

1 Response

  1. Felagund

    이퀄리즘은 자가확증편향과 반지성주의가 만들어낸 날조된 개념이라는 사실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이퀄리즘과 가장 유사한 개념은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즈류의 에쿼티 페미니즘 혹은 시장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이지만 이퀄리즘은 이것조차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인터넷 이용자들의 뇌피셜을 짜깁기 한 것으로 밝혀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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