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S] 당신은 나의 공간을 ‘보고’ 있고, 나는 그 공간에 ‘살고’ 있다

나는 기억한다. 친밀한 관계에서 느꼈던 그 공포, 분노, 두려움, 무력함, 울분을. 그리고 실감한다. 파트너의 지정성별(그리고/혹은 젠더 표현)에 따라 나와 ‘우리’의 ‘안전’이 얼마나 쉽게 달라졌는지를. 이게, ‘여성’으로서 내가 겪은, 자취방이다.

마리안 자취젠더

| 마리안

아마 21살 때부터는 늘 애인과 함께 살았던 것 같다.

한 때 ‘여자’애인과 같이 살던 자취방은 대문 하나, 유리문 하나, 계단 하나를 지나야 현관문이 나오는 곳이었다.
오랜만에 본가에 온 날 새벽. 그녀는 카톡을 하던 중 갑자기 누군가 번호키를 누르고, 문을 세차게 잡아당기고 있다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버렸다고 했지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지금이라도 뛰쳐나가야 할까
나는 그날 밤새 전화기를 꼭 붙들고 있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뒤 가끔의 새벽에 찾아온 두려운 발자국과 이유 없는 두드림에도, 함께 있는 순간에조차 나는, ‘우리’는 정말이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 나는 지금 ‘남자’애인과 함께 문을 열면 바로 놀이터가 보이는 지층 원룸에 살고 있다.
이제 샤워를 할 때 꼭꼭 창문을 닫는 건, 낮이든 밤이든 집에 들어올 때 현관문을 황급히 붙잡는 건 나뿐이다. 함께 지낸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애인 혼자 밤늦게 집에 들어갈 때도, 함께 집에 있을 때도 그 날처럼 낯이 새파랗게 질릴 정도의 불안함은 느껴본 적이 없다.

마리안 자취젠더 2

그리고 올해 초, <자취방>이라는 이름의 사진집이 발간되었다. 핑크색 수영복을 입고 세탁기에 들어가 있는, 지붕에 짧은 치마를 입고 누워 있는 ‘여성’들은 “여자 혼자 사는 자취방”의 ‘섹시함’으로 ‘전시’되었다. 기실 (이성애)남성 중심적인 관음의 시선은 언제나 ‘여탕’, ‘여중여고’, 여초 커뮤니티를 비롯한 “여성의 공간”을 훔쳐보고자 욕망해왔고, <자취방> 사진집은 그것을 너무나 얇고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례였다. 그러나 더 문제적인 것은 달지만 도수가 센 칵테일이 ‘작업용’ 술로 내걸리는, “잘 취하고 자취하는” 여자가 이상형이라는 농담이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는 사회에서 그 사진들이 “여성의 공간”에서 실로 무엇이 경험되는지 쉽게 은폐해버렸다는 것이다.

“여성이 특별하면서도 특별하지 않는 장소에서 존재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 “여성이 머무는 공간”의 사진을 찍게 되었다는 작가는 바로 그 재현과 상상을 통해 ‘여성’이 ‘머물 수 있는 공간’ 자체를 탈취해버렸다. 사진집이 논란이 된 이후 트위터를 비롯한 SNS에 ”#이게_여성의_자취방이다“라는 해쉬태그를 달고 공유된 수많은 공포와 위협의 경험들에서 볼 수 있듯, 두려운 발소리, 창문 너머의 눈동자, ‘습관이 된’ 문 두드리는 소리, 이중삼중의 방범장치, 굳이 좁은 방 한 켠에서 말려야 하는 속옷 빨래, 전화통화 연기, 부러 내어놓는 남자 신발… 이 모든 것들은 바로 그 “여성이 머무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보통의 경험”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자 그대로의 ‘판타지’와 고민 없는 재현은 누군가 일상적으로 겪는 불안과 폭력을 단지 ‘섹시함’으로 소비한다. 최근 계속해서 화두가 되고 있는 ‘표현의 자유’가 현실의 무엇을 삭제하고, 그럼으로써 무엇을 재/생산해내는지 묻지 않는다면 그 ‘자유’는 실로 일부만의 특권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나는 혼자서만 살아본 경험이 없어 “여자 혼자 사는 자취방”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친밀한 관계에서 느꼈던 그 공포, 분노, 두려움, 무력함, 울분을. 그리고 실감한다. 파트너의 지정성별(그리고/혹은 젠더 표현)에 따라 나와 ‘우리’의 ‘안전’이 얼마나 쉽게 달라졌는지를. 이게, ‘여성’으로서 내가 겪은, 자취방이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