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S] 더 킹, ‘남성’ 국가의 노래

팬트하우스, 황금빛 샴페인이 찰랑이는 잔, 스테이크, 그리고 ‘여자’. 남성 중심의 역사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말하지 않는 육체들로 출현한다.

 

영화 의 한 장면.

ⓒ영화 <더 킹> 의 한 장면

조윤 

박태수는 ‘양아치였던 아버지’ 밑에서 양아치처럼 살아왔다. 무서울 것 없어 보였던 아버지가 검사에게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 애원하는 모습을 보며, 권력을 가진 검사가 되겠노라 다짐한다. 박태수는 검사가 되지만, 검사의 세계는 99%의 “정상적인” 사람들과 1%의 권력자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후 99%에 속해 있던 박태수는 한강식을 만나 1%의 세계에 진입하여, 권력과 부를 누리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는 박태수가 한강식에게 버림받게 되면서, 복수하는 과정을 빠르게 그려낸다. 박태수는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역사가 ‘1%의 사람들’에 의해 흘러왔다는 것을 폭로하고, 총선에 출마해 “목포의 아들”로써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곤 카메라(관객)를 향해 손을 내밀며 “당신이 이 세상의 왕이니까” 선택은 ‘당신’의 몫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한재림 감독의 영화 <더 킹>(2017.1.8. 개봉)은 <베테랑>(2015), <내부자들>(2015), <판도라>(2016) 등과 함께 “대중영화의 문법 속에서 한국 사회의 모순을 비판한” 사회파 영화로 분류된다. 사회파 영화는 권선징악 서사를 따라 정의(justice)를 구현해내는 판타지를 그려내면서 관객들에게 쾌감을 선사한다. 어떤 이는 이 영화에서 ‘대한민국의 현재’를 읽었고, 어떤 이는 박태수가 건낸 마지막 메시지를 수용하며, 자신이 ‘투표권을 가진 시민’임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으며, 어떤 이는 ‘앞으로’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나도 이 영화에서 (이들과는 조금 다른) ‘대한민국의 어떤 현재’를 읽어냈고, ‘앞으로’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이 세상의 왕”이라는 메시지에 끝내 몰입하지 못했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당신’, ‘왕’, ‘역사’, ‘세상’ 등의 기표들에 머물지 못하고, 머뭇거렸던 이유는 이들이 그려낸 세계에 무언가가 삭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역사라는 이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정의라는 이름의 미래에 삭제된 누군가.

앞서 최근 한국 영화의 흐름으로 사회파 영화를 언급하였다. 다른 한편에서, 손희정(2015)은 “남성 캐릭터의 전횡과 여성 캐릭터의 실종, 즉 남성의 과잉 재현과 여성의 과소 재현에 따른 상징적 소멸(17)”을 짚어낸 바 있다. 손희정의 진단은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던) 한국 영화가 그려내는 세계가 ‘누구의’ 세계이며(‘누구’를 배제하는지), 이들이 구현하고자 하는 정의가 ‘누구를 위한’ 정의인지를 질문하게 한다. 나아가 이러한 정의 구현 과정에 기꺼이 ‘당신’으로써 몰입하고, 승리감을 공유하는 자들은 누구인가를.

“내가 역사고, 국가야.”

<더 킹>은 박태수를 중심으로 두 가지 역사를 그려낸다. 박태수는 한편에서 검사계의 1%에 속하는 한강식, 양동철과 함께 권력의 역사를, 다른 한 편에서 고등학교 동창 최두일과 함께 우정이라는 역사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두 서사를 구축하기 위해 동원되는 ‘여성’이라는 기표가 있다.

박태수와 한강식의 첫 만남 사이에는 성폭력 사건이 놓여있다. 99%의 평범한 검사 시절, 박태수는 제자를 성폭행한 교사가 500만원의 합의금에 풀려났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그를 구속하지만 이후 양동철과 한강식의 압박과 회유에 못 이겨 기소를 포기한다. 이 과정에서 양동철이 박태수에게 ‘검사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권력과 손잡을 것’을 제안하며 건낸 마약·섹스 스캔들이 담긴 비디오테이프 속에는 ‘여배우’ 차미련이 등장한다. 차미련은 화면 너머의 박태수를 유혹한다. 섹슈얼리티로 환원된 여성은 ‘권력에 대한 남성 욕망’의 은유로 사용된다. 교사에 의해 행해진 ‘어린 여성’에 대한 실제적 폭력은 박태수가 ‘젊고, 매력적인 여배우’에게 행한 또 다른 상상적 폭력과 교환된다. 두 인물의 연결점으로서의 쓸모를 다 한 성폭행 사건은 ‘(성폭행범이) 고자가 되었으니 앞으로 여자에게 함부로 못 하겠지’라는 박태수의 내레이션으로 급하게 처리된다. 뿐만 아니라 영화 후반부, 박태수의 폭로 이후 도망 다니던 양동철이 지하 주차장에 숨어 ‘여자들의 치마를 훔쳐 보다’ 적발된 사건이 슬프게도 일부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하는 장치로 기능한다는 사실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한편 한재림 감독은 영화에서 권력에 대한 욕망을 물질로 시각화한다. 팬트하우스, 황금빛 샴페인이 찰랑이는 잔, 스테이크, 그리고 ‘여자’. 남성 중심의 역사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말하지 않는 육체들로 출현한다. “여기가 진짜 내가 원하는 세상이다”라는 박태수의 내레이션을 배경으로, 권력에의 욕망이 응축된 공간-팬트하우스-에는 ‘남성’의 승리를 축하하고, 패배를 달래는, “편하게 만지고 놀 수 있는 ‘년’들”이 있다. ‘년’들은 남성 사이에서 교환되며, 남성 간의 연대와 약속을 구축하는 ‘도구’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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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이름’으로 불리며,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두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박태수의 아내로 등장하는 임상희는 “전형적인 조신한 여자”의 틀을 벗어남으로써, 안희연 검사는 권력 비리를 밝히고자 분투하며, 감히 남성 권력에 도전하는 “미친년”으로 불림으로써 생명력을 얻는다. 영화에서 가정하고 있는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 ‘여성적 특질’을 제거함으로써 ‘여성’으로 존재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마저 후반에는 박태수의 복수를 뒷받침하는 보조적인 역할에 그쳐 버린다.

이 영화는 소수의 권력자들에 의해 사회의 부조리함이 생산되고 있음을 주요하게 짚어낸다는 점에서 단순한 오락 영화가 아닌,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청춘, 가족, 그리고 친구”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서야, “정치로 누군가(한강식)를 잡고 싶은 마음”에 ‘정의를 구현하는 목포의 아들’로 변신한 박태수에게 정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나아가 감독 자신이 딛고 있는 ‘남성’이라는 권력적 위치에 대한 성찰의 부재, 여기에서 발현된 여성 재현 방식은 사회파 영화라는 외피 안에 젠더 폭력이라는 또 다른 부정의를 만드는 역설을 발생시킨다. 한재림 감독이 그려낸 ‘정의’와 ‘희망’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가 진정 ‘정의’와 ‘희망’을 그리고자 했다면 박태수는 관객들에게 감히 ‘더러운 손’을 내밀지 말았어야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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