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나에 관한, 너를 향한 자치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 타자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 나의 행위와 일상의 리듬에 변화를 주었을 때, 우리는 더 많이 살고 더 크게 움직일 날개를 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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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짱큰콩

꽤 많은 것들을 유예하고 걸어왔을 당신과 나는 지금 이렇게 우연히, 불쑥 마주쳐버렸다. 새로 지은 건물과, 새 건물을 위해 허물어져야하는 건물들로 이뤄진 이곳의 이름은 ‘대학’이며, 그 건물을 아직 떠나지 못하는 이들과, 건물에서 나와 설 자리를 잃어가는 이들이 알게 모르게 매일같이 응성거리는 곳의 이름 또한 ‘대학’이다. 그곳 어딘가에서 이 장을 펼쳐 읽는 지금 당신은 ‘새내기’라는 이름을 원하든 원치않든 얻었거나 한때 얻었을 것이며, 그 이름에 부합하도록 혹은 벗어나도록 짜여진 미지의 관계망 속에서, 또 다른 삶을 꾸려갈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부쩍 책임, 독립 이런 말들의 세례를 자주 받는 요즘일 것이다. 글쎄, 그럼 이전까지 나는 내 삶에 대한 책임을 마냥 다른 이에게 전가시키고 살아왔던가, 하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과거보다 더 많이 요구받는 태도임은 확실하다. 보장된 것은 적은데 책임질 것만 점점 더 늘어나는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그 덕분(?)에 ‘나’에 관한 생각에 빠져들 시간을 가져보기도 한다. 스스로에 대한 책임과 다스림, 그래 자치, 과연 나는 ‘나와 나를 둘러싼 일들을 책임지고 다스려나가는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정도의 생각을 슬쩍 하다보면, 금새 목 아래부터 턱하고 막히기 시작한다.

그런데 말이다. 자치라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꽤나 흥미로운 점을 찾을 수 있다. 표면적인 의미와 실상이 꽤나 다르다는 점이다. 주체의 단위가 나라는 한 사람이든 여러 명이 일군 단체든, 어딘가에 경계선을 긋고 내부의 삶을 다스리는 일이기는 하지만, 온전히‘나의 삶’을 유지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내 삶을 다스리는 일’을 이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과 내가 늘 ‘관계’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혼자를 먹여살리는 일부터 내외적으로 조금 더 성장시키는 일 모두를 포함해서 말이다. 가령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식당을 찾거나 스스로 요리를 하기 위해 레시피를 찾고 식재료를 구매할 때조차 다른 이의 수고를 요구하며, 공연을 관람하거나 직접 참여할 때에도 다른 이의 손을 잡거나 손을 빌리게 된다. 글을 쓰거나 말할 때는 누군가를 향해,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혹은 누군가의 저작물의 도움을 받아 그와 같은 행위를 해낼 수 있다. 모든 시간 속에서 당신은 다른 누군가(원하든 원치않든)의 인정을 바라거나 시선을 신경쓰고 그에 맞춰 혹은 반하여 행동할 것이다. 나와 당신의 모든 생활은 이미 오랜시간 축적되어온 어떤 관계망 속에서 이뤄지고있는 셈이다. 아아- 그렇다면 성공적인 ‘자치’를 해내기 위해 우리는 이것을 잘 활용하면 그만이겠다. 먼저‘나의 니즈’를 파악하고, 목표를 설정하여, 주어진 수단들을 찾아내 지금 당장 필요한 논의나 물건 교환이 이뤄지는 관계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언제고 자유롭고 당당하게 취해버리면 그만이겠다.

문제는, 이같은 명쾌한 삶이 현실적으로 불가하다는 것이다. 나의 의지와 계획에 앞서 존재하는 관계망이 안타깝게도, 결코 평등하고 중립적인 가치에 따라 열려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인간인 당신과 나는 지금, ‘계급적 인간’이자 ‘젠더적 인간’으로 놓여있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우리는 특정한 자리들을 차지하게 된다. 그 어떤 자리는 종종 당신에게 특정한 행위를 요구하거나 금지하기도 한다. 가능한 행위의 범주가 한정된다는 말이다. 당신이 사회에서 어떠한 행동을 얼만큼 할 수 있는가를 결정짓는 조건은 나아가 당신의 삶, 존재 그 자체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스스로를 잘 다스리고 싶다던 애초의 힘찬 의지나, 온화하고 넉넉한 태도는 당신을 압도적으로 제약하는 외부 상황을 맞닦뜨리는 순간 주저없이 무너져내리고 말 것이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어찌하여 이렇게나 적을 수 있느냐고, 한숨지으며 말이다. 내 행위를 규정짓는 경제적, 문화적 조건은 ‘자치’를 생각하고 행할 수 있는 역량과 범위마저 한정시켜버린다. 우리의 처지가 이러할지대, 과연 ‘나’는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자치를 스스로, 혹은 내집단 안에 머물며 무사히 이뤄낼 수 있을까?

나는 부정한다. 대신 다른 과정을 제안하고 싶다. 그렇다면 다른 자치는 어디서 가능할까. 다름 아닌, 그 밖에서다. 나라는 존재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타자를 ‘경유’해야한다는 말이다. 가령 위기에 처한 타자의 존재 조건을 함께 바꿔내는 노력같은 것이 필요하다. 나와 공통성을 가진 이의 행위 조건이 안정되었을 때, 사회적으로 용인될 떄, 나의 존재 또한 보장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고통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해당 상황을 설명할 마땅한 언어를 찾지 못할 수 있다. 기존 질서와 규정을 이미 충분히 체화했을 때, 해당 질서 안의 사고는 주변의 모든 풍경을 ‘자연스러워 보이게끔’ 하기 때문이다. 오직 내 안에서의 사고에만 머물게 될 때 새로운 감각은 종종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며 외부로부터의 제약과 익숙한 사고의 체화 속에서 묻히고는 한다.

전자의 경우, 인지된 공통성을 가진 이들이 모여 목소리를 내면 된다. 그럼 후자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할까. 좀 더 무모한 방법을 나누고 싶다. 자치를 위해 스스로 세운 바 있던, 타자와 나 사이를 가르던 벽을 허무는 것이다. 그 너머로 나를 내던지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사람과의 깊이 있는 만남일 수도 있고 다른 학문과의 조우일 수도 있다.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 타자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 나의 행위와 일상의 리듬에 변화를 주었을 때, 우리는 더 많이 살고 더 크게 움직일 날개를 달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치란 어쩌면 수백통의 편지를 오랫동안 여럿에게 쓴 뒤 도착하는, 종래의 답장인지도 모른다. 나에 관한 것에서 나의 바깥에 선 너에 관해 생각하고 너를 향해 말 건네는, 소란스럽고 연속적인 행위들로 이뤄진 편지 말이다. 외부에 놓인 우리의 행동 조건을 함께 변화시켜 나의 존재 조건들이 마침내 바뀐다면, 그때, 돌아보면 어느새 우리는 자치’되고’ 있는 것 아닐까. 이미 여유로워진 사고와 행위 안에서 활발히 살아가고 있을테니, 서로를 경유함으로써 스스로 다스리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의 삶을 책임지려는 노력은 결국 늘 타인의 삶을 책임지려는 노력으로 연결되며 이를 통해 가능해지는 셈이다.

이 길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이 필요할까. 먼저 타자에 대한 감각을 열어둘 필요가 있겠다. 그 속에서 수많은 성찰을 해야함은 물론이다. 밥 먹을 때 수저라는 수단을 필요로 하듯 고민에도 수단이 필요하며 페미니즘이 대표적 예다. 관계망을 끊임없이 직시하게 하는 교차성의 방법론은 보다 풍부한 사유를 끌어낼 수 있다. 사유와 감각은 그 연결이 중요하기에, 경험들의 축적 또한 필요하다. 꽁꽁 감춰진 중요 정보를 들추고 주변을 함께 변화시키는 경험들의 축적은, 서로를 지켜낼 보다 큰 힘을 쥐어줄 것이다. 물론 경험의 지속성을 위해 우리의 기반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 담론을 고민해 볼 이유 중 하나다.

위와 같은 내용을 모두 담아, 우리는 이 곳에서‘나에 관한 – 너를 향한’ 자치를 해나갈 것을 다짐하며 제20호를 띄운다. ‘나에 관한’ 자치에서 ‘너(타자)를 향한 자치’로 나아갈 때, 당신의 자치는 보다 견고하고 풍부해질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오늘 당신과의 우연한 마주침에서 의미를 획득한 본 특별호가, 서로의 존재를 밝혀줄 반딧불이로 가능한 오래 남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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