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새내기’에 관하여

분명하다. 우리는 “새내기”를 알았던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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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구

여기 새내기가 있다.

그렇다면 그 새내기는 어떤 새내기인가. 매년 3월 즈음이면 학보사를 비롯한 유력언론, 블로그, 페이스북 페이지가 소개하는 “새내기룩”(그것이 무엇이 새내기와 연관인지 모르겠지만)을 입은 새내기인가. 아니면 그 팔짱을 낀 채 앉아서 혀를 차게만드는 ‘요즘것들’로서의 새내기인가. 검은색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 남성이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입학 축사를 읊을 때 등장하는 출발과 활기, 미래의 주역으로서의 새내기인가. 자조적인 표현으로서 비-새내기, “헌내기”로 불리우는 이들이 낭만화된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 사용하는 “새내기 시절”의 새내기인가. 혹은 교육의 대상으로서 미성숙이란 이미지를 껴안고, 남성중심적인 대학문화 속에서 꼰대질과 폭력에 절규하는 새내기인가.

글은 독자 당신이 누구인지 물었다.

첫번째 답은 신입생 독자에게서 나왔다. 오리엔테이션과 학과별 사전 모임인 정모를 바삐 거쳐온 누군가라고 당신은 답했다. 당신에게 쏟아지는 축복들을 걱정했다. 대학에서 학자금, 정체성, 그리고 넓은 의미의 ‘문화’와 당신이 맺을 관계를 생각했다. 수 많은 기대의 언사들, ‘희망’, ‘출발’, ‘활기’를 가로질러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둔 당신의 걱정거리를 감히 어림 잡을 수 있길 기도했다. 그 다음 새내기를 지나쳐온 독자가 답했다. 당신의 앞에 붙은 학년이란 숫자와 이에 덧씌워진 무게에 멈춰섰다. ‘새내기’에 대한 이야기들, “취업하려면 1학년때부터”, “새내기때는 무엇 해야해”, “새내기라면 무엇을 알아야한다”는 말로 당신의 과거를 분과 초단위로 반추하고, 경험을 재구성해야하는 현실을 잊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대학 바깥의 ‘새내기’ 독자들이 답했다.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처음 접하는 대학 바깥의 새내기. 얕은 글쓴이의 경험이 쉽게 ‘새내기’를 재단치 않도록 경계했다. 서울시 내 4년제 대학에 다니는 누군가가 ‘새내기’에 관해 말하고 있음을 상기하며, 글은 글의 한계를 가늠했다.

‘어떤 새내기’에 관해 쓰는 일을 포기했다. ‘이런 새내기’라던가 ‘저런 새내기’에 관해 논하는 것을 접어두었다. 다만,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새내기’라는 언어가 기능해온 방식과 효과를 추적했다. 이 글은 이렇게 쓰였다.

‘새내기 이전의 새내기 / ‘청소년담론’과 ‘청년세대론’의 사이

새내기는 결국 통과된다. 이 점에서 새내기란 별안간 지나가는 시기적 표현과 다르지 않다. 허나, 시간이 품은 겹겹의 기억은 문제를 유발하고, 새내기는 새내기가 되기 전부터 무엇이 새내기인지 알았다. 새내기 이전의 새내기. 그것은 새내기’에 관한 이미지와 이야기였다. 글은 이를 재현과 담론이라 불렀다. 바꿔 말하자면, 새내기에 관해 말해온 재현과 담론의 역사로부터 당신의 이름 ‘새내기’는 구성되었다. 또한 그 이름은 결코 단일하지 않았으며, 고정되어있지 않았다. 외려 모순적 기대를 동반했다. “활기”와 “밝음”, “생기”로서 새내기는 추앙받았지만, 반대편에서는 ‘미성숙’한 이들로 우려의 대상이었다. 새내기로 이름 불려진 당신이 통과해야 했던 건, 흐리면서도 맑은 날씨였다.

새내기의 나이를 스무살 언저리로 설정하는 것은 외려 많은 새내기를 탈각시키지만, 새내기라는 분화된 상(image)은 분명 스무살 언저리에 존재했다. 이제 막 청소년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새내기는 청소년에 관한 담론들로부터 도착했고, ‘요즘것들’의 최신으로서 청년담론과 관련이 있었다. ‘청소년’과 ‘청년세대.’ 1 이 두 범주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진입’하며 ‘적응’하는 기간으로 여겨질 뿐 아니라, 실제 호명되는 이들의 기대 연령 역시 ‘새내기’에 대한 기대 연령과 유사했다.

청년과 청소년은 비슷한 방식의 다른 양상으로 담론과 이미지를 통해 억압 받았다. 그 중 청소년 운동은 지속적으로 나이주의를 비판해왔다. 2 인권운동가 필부는 주간인권신문<인권오름>에 기고한 글을 통해 나이주의를 “나이를 중심으로 어떤 사람의 특성을 섣불리 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 사람을 대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나이로 사람의 특성을 섣부르게 규정하는 일이란, 청소년을 나이에 기반한 상(image)을 통해서 이해하고, 또 대하는 것을 가리킨다. 일례로 청소년으로 불리는 이들의 행동은 쉽게 병리화된 ‘병든 청소년’이라던가, ‘탈선’ 또는 교육의 대상(image), 그리고 때로는 신화화된 이들로서 ‘미래’와 ‘희망’이라는 이미지에 끼워 맞춰 설명되오곤 했다.

청소년의 억압 기저에 나이주의가 존재한다면, 청년은 세대론, 또는 세대주의 3 가 있다. 청년은 세대론을 통해, 세대주의에 의해, 다분히 자의적인 판단을 통해 3포, 사토리, 심지어 최근에는 ㅇㅈ세대로 호명되어 왔으며, 모순된 기대로서 분화돼왔다. 예컨대 ‘20대 개새끼론’ 속에서 청년은 보수화되었지만, 지난해 총선을 “20대의 투표”의 승리로 표현할때 청년은 소위 ‘진보’를 상징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저자인 오찬호에게 청년은 서로를 향한 “차별에 찬성”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이기에 “자신과의 경쟁에서 누락된 이들”을 향해서는 공감이 부재한 세대로서 부각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글로벌 정치연구소의 장석준은 지난1월 16일 자유인문캠프 강연을 통해 촛불을 혁명이라 표현하며, 그 핵심 동력으로 미디어리터러시(매체 문법)를 지닌 요즘세대의 가능성 주목한다. 심지어 G세대 담론은 20대를 ‘김연아’,’박태환’을 얼굴과 함께, ‘글로벌’시대에 맞는 인재라고 하지 않던가.

그 외에도 실크세대, 88만원세대,ㅇㅈ세대, 월드컵세대, 촛불세대 등 수많은 세대론들은 입을 모아 ‘그들’에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청년은 때에 따라서 미래의 인재이자, 진보의 상징이었고, 때론 신자유주의를 체화한 주체이기도 했으며, 첨단의 유행을 선도하는 트랜드 세터였다. 그리고 자주 정치에서 탈각된 비난 받아야할 소비주체였다. 양분된 기대와 끊인적 없는 관심이 지난 10년 동안 청년이라는 단어를 겹겹이 에워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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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긔라고? ‘새내기’의 하루? ⓒKT

대학생이지만, 대학생이 아닌 새내기

청소년과 청년은 그 위치를 ‘불안정’과 함께 했다. 이때 ‘어른’ 혹은 ‘성인’이라는 생애주기는 계급적인 차이, 젠더적인 차이, 또는 교차해야할 다른 범주를 생략하면서, 오직 연령에 기반한 안정된 상태를 가정했다. 이들은 여기에서 저기로 이행하는 시기였고, 때문에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했다. 법률상 어른인 청년은 여전히 다른 의미에서 ‘어른’에 도달하지 못한(마치 3포가 강요하는 연애, 결혼, 출산의 ‘어른’과업을 실행하지 못하는) 이들로 말해졌고, 새내기 역시 다르지 않았다. 새내기는 분명 대학생이었지만, 대학생이 아니었다.

“너 새내기 티 좀 벗었다? 이제 좀 대학생 같네!”

인용문은 2015년 9월 6일 중대신문의 기사 <‘짐승남’보다 ‘꽃미남’ 소리를 듣고 싶다>에서 등장했다. 생애 처음 화장을 한 기자는 선배로부터 “새내기 티 좀 벗었다?”하는 말을 듣는다. 이어 붙는 “좀 대학생 같네” 라는 문장 속에서 이미 대학생이었던 “새내기 티“를 지녀왔던 기자는 “이제 좀 대학생”으로 승인된다. 화장을 하고 옷을 갖추어 입은 뒤의 일이다.

대학생이 아닌 대학생, 새내기는 누구인가. 형용사로서 새내기를 통해 그 흔적을 살피는 일이 가능하다. 새내기의 낭만, 새내기의 일상, 새내기 생활. 새내기의 형용사적 표현에는 ‘새내기에게 무언가 특별함이 있다’는 기대가 근간을 이룬다. 2016년 4월 3일 <학생들은 어떤 총학생회를 원할까요?>라는 기사 속에서는 새내기의 용례 또한 그렇다. 광역화제도의 부작용에 대해 말하며, 한 학우는 사례로 “새내기 생활을 즐겨야 할 신입생들이 광역화라는 이유만으로 동아리 활동 등에 참여를 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이때 ‘새내기 생활’이란 그저 신입생들의 생활, 일상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리라. 특정한 방향과 방식을 지칭하리라. 새내기 생활은 “동아리 활동등에 참여”가 가능한 시간이지, “공부만을 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취업’으로 대표되는 대학 이후에 대한 부담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시기, ‘자유’가 허락되는 시기로 ‘새내기 생활’은 말해져 왔다.

헌내기와 새내기

이런 점에서 새내기는 자조적 표현으로 헌내기와 구분되어졌다. 중대신문 코너 <나도 한마디>에 2015년 3월 29일 게재된 글 또한 같은 맥락에서 새내기를 낭만화하며 헌내기와의 이질성을 강조한다. 새내기란 “모두 나를 부러워했”던 시기이자, 그 이름 자체로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이름이다. 동시에 2학년은 이와는 “사뭇 마음가짐이 달라졌”던 시기가 되고, 3학년인 당시 13학번에 대해서는 “사망년”이 되었으며, 이들의 존재는 “사라졌다”고 표현한다. 이 사라짐이란 헌내기가 밖에 돌아다니지 않고 다른말로 ‘취업준비’ 혹은 ‘학점’을 위해 도서관에만 박혀있다는 가시성을 의미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담론 상에서 사라짐 또한 가리킨다.

새내기라는 불안정성으로 가시화되었던 이들은 시간이 지나, 졸업생이 아닌 “취준생”이란 불안정성의 이름으로 다시 담론의 장에서 중심에 위치하게 된다. 다시 새내기로 돌아오자. 이들은 “자랑스러”움을 느끼고, 동시에 “낭만”을 가질 수 있는 존재다. 헌데, 이들에게 허락된 자유는, 새내기가 아직 “현실”을 모른다는 이미지와 공명한다. 아직 현실을 몰라도 괜찮은 사람들. 이들은 아직 “새내기 티”를 지닌 청소년 상(image)의 세련되지 못한 이들. ‘허락’된 “자유”, “낭만” 그리고 반대편에서 현실을 ‘아직’ 몰라도 괜찮다는 은근한 멸시. 역으로 ‘현실’을 알아간다는 ‘대학생’, ‘헌내기’를 구성해내는 효과.

이처럼 새내기는 대학생이지만 대학생이 아니었다. 새로운 공간에 놓인 존재는 그 자체로서도 불안정성을 지니지만, 대학생을 지닌 채 청년담론과 청소년담론 사이에 위치한 새내기는 몇 겹의 ‘미성숙’과 ‘새내기 신화’로 분화된 이미지를 뒤집어써야 했다. 안정적인 정체성 ‘대학생’을 획득하기 위해 새내기에겐 “새로배움”이 필요했다. 때문에 대학에 발을 딛기도 전, 또는 내딛자 마자 신입생들이 떠나게되는 오리엔테이션은 “새내기 새로배움터”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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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패션 따로있나요.. ⓒ두타 

새내기를 말하라

그 ‘배움터’에는 여러 맥락이 공존했다. 어둠의 대나무숲 230699번째 속삭임의 제보자는 “해외여행 오티와 새터에 참석하지 못하게되”어, “친구나 선배 사귀는 데” 어려움을 걱정한다. 여기서 새터는 대학문화를 접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대학에서 서로다른 개인들을 만나고 관계맺는 시작이었다.

70호 중앙문화 <소수의견>에 실린 기사 “나는 평범하다. 고로 정치한다” ‘진보 3당 당원을 만나다’ 속 변규홍의 한마디는 ‘요즘새터가~’류의 비판과 일치한다. 그는 과거에는 “새로 입학한 구성원을 학생 사회에 속하게 만들기 위해 정치교육”을 했던, 새터가 “지금은 술만 먹는 자리”가 되었다는 점은 그가 지적한다. 이때의 새터란 대학생이라면 응당 지나쳐야하는 정치”교육”의 자리가 된다. 새내기는 ‘정치화되지 않은 이’이며 , 대학생은 ‘사회운동, 변혁, 진보’의 주체로서 등장한다.

헌데 “학생자치”라는 언표와 함께 ‘새내기’가 등장하는 경우는 대학사회의 담론 경제 속에서 “학생자치”라는 언표의 위상만큼이나 뒤편이다. 눈에 띄는 것은 기업, 마케팅, 등에서는 신입생을 주요 소비자로 호명하는 경우다.

의류는 ‘새내기 룩’의 이름으로, 노트북 등의 전자기기 일체는 ‘새내기 상품’이 되어, 전달된다. 언론, sns페이지, 블로그 등의 매체는 3월이면 ‘새내기 옷차림 제안’을 통해 이에 동조한다. 이때 새내기는 변규홍이 말하는 진보적 주체 ‘대학생’으로 거듭나야할 ‘새내기’와 다른 소비주체다. 다른 방식도 있다. 입학식 축사 속에서 새내기는 “정상의 꿈”과 “최고의 꿈”을 찾아야 하는 이다. 4 새내기는 “애플의 스티브잡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안 롤링”처럼 “다시 일어나 도전”하는 자기계발 주체 역시 되어야한다.

새내기 이미지에 근거한 실천

새내기를 말해야하는 이유와 상황은 계속해서 조성된다. 이들은 ‘진보적 대학생’이 되어야할 과업을 지닌 정치주체이기도 하고, ‘대학생룩’과 ‘대학생 상품’이 겨냥하는 소비주체기도 하다. “정상의 꿈”을 향해 도전하고 “스티브잡스”를 본받아야만 하는 “다시 일어나 도전”하는 자기계발 주체로서 사명 역시 부과된다. 수 많은 기대들이 새내기를 애워싸는 형국. 그 이미지들. 허나 새내기가 입은 상(image)에 대한 의심은 부재하다. 여전히 우리는 이 모호한 새내기 상(image)을 실존하는 새내기로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계해야한다. 상(image)에 근거해 ‘저 언저리 누군가 존재할 것이다’하는 상상이 위험함은, 상(image)에 기반한 실천이 만들어내는 문제와 상(image)이 간과하는 범주 내부의 이질성 때문이다. 일례로 ‘청년’에 대한 상상에 근거한 정책이 만들어내는 불평등과 기만을 목도하지 않았던가.

‘청년’에 깃든 “열정”의 상(image)은 “열정페이”로 나타났고(물론 열정페이는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생긴 언어지만), 2000년대 이후 88만원 세대, 사토리 세대, 3포세대 등 경제적 약자로서만 표상된 청년 담론과 이미지 덕택에 청년에 관한 정책은 5 최근까지 주로 경제적 정책에만 국한되었다. 그 외에도 88만원세대 류의 시도는 불평등을 세대의 문제로 풀어내며, 계급을 탈각시킨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고, 3포세대론의 경우 연애-결혼-출산의 이성애-남성-가부장의 가족구성 과업을 몰젠더적인 ‘청년세대의 과업’으로서 상정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필시 ‘스무살 언저리의 미성숙하지만 가능성있는 새내기’의 상(image)이 누락하는 다른 새내기가 존재한다. 마치 ‘세대론’이 누락하는 ‘청년’처럼.

그중에서도 끊임없는 새내기에 대한 상상(image)이 대학 내 남성중심적인 문화에 부딪히게 되면 새내기를 향한 똥군기, 또는 성폭력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새내기를 향한 억압에 남성중심적 문화를 부연으로 붙인 이유는 이렇다. 어떤 면에서 새내기는 ‘미성숙’과 ‘활기’로 분화되는데, 이는 여성을 분화하는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을 닮았고, 둘 모두 ‘통제’되어야할 대상으로 다뤄져 왔다. ‘권위’와 ‘안전’을 이유로 쉽게 억압이 비호되는 것 역시 그렇다.

새내기들이 공적인 곳에 등장하는 일도, 섹슈얼리티도, 모두 누군가의 ‘승인’이 가능해야했다는 사실은 최근까지 꾸준히 이야기되어온 대학 ‘똥군기’사례로 쉽게 증명가능하다. 여성을 “출산”의 기계로 통제하려하는 가부장적 국가의 욕망을 ‘가임기 지도’가 보여줬다면, 대학 내부에서 새내기에 대한 ‘통제’담론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새터’와 ‘단톡방’이다.

제목 없음

신입생을 향하는 폭력 ⓒ국민일보

통제의 대상 새내기?

최근 페이스북 페이지 대나무숲과 어둠의 대나무숲을 통해 모 단과대의 새터의 “통제”에 대한 문제제기가 등장했었다. 그 중 #대나무35635글은 “말도 안되는 통제, 빡빡한 일정”에 대해 비판한다. “권위적인 진행 말투”를 지닌 진행단이 “교관들인 줄 알았”다는 말이 이어진다. 이러한 억압 경험에 대한 서술은 그가 동일한 “통제”대상으로의 청소년 상(image)에 근거해 10대시절의 “중고등학교 수련회”경험에 빗대어진다.

새내기 기획단으로 보이는 제보자 #대나무35636 역시 이와같은 통제가 문제라고 한다. 제보자는 새터를 “성인을 중학생 대하듯 통제”하는 경험으로 설명한다. “중학생 대하듯 통제”라는 말은 청소년에 대한 억압적 이미지(image)와 함께, 대학생이지만 대학생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새내기의 일면을 비춘다. 어둠의 대나무숲 #230949번째 속삭임은 “사과대 학생회 남성 두 분이 아무 인기척 없이 들어”왔다고 고백하며 위협을 느꼈다고 토로한다.

온라인이나 메신저를 통해서도 새내기는 통제를 경험한다. 이때 경험은 ‘통제’가 아닌 ‘감시’의 이름으로 발화된다. 어둠의 대나무숲 #230682번째 속삭임은 “최근 17학번 x과 새내기단톡방에 14 선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감시당하는 느낌”을 토로한다. 어둠의 대나무숲 #230714번째 속삭임은 스파이 제도가 “활성화를 위해 한다”는 것에 대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심한다. 이 같은 게시글에서 촉발된 “새내기를 향한 통제”에 대한 문제제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위해서’와 ‘그래도 자유침해는’의 입장이 대립하는 댓글 장을 만든다.

매체의 역할, <선배들의 이유 있는 침묵>에서 <강요된 친목>으로

이 같은 상황에서 학내언론 매체가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의 문제는 중요하다. 관련해 중대신문의 2015년 11월 23일 발행된 3편의 기획기사와 2017년 2월 23일 발행된 3편의 기획기사는 비교해볼 가치가 있다.

먼저 2015년. “진심 어린 조언이나 충고”가 꼰대질로 뵈게 되는 것이 두려워 선배들이 <선배들의 이유 있는 침묵>을 하고 있다는 진단은 2015년 11월 23일 발행된 3편의 기사가 지닌 공통의 문제의식이었다. 그중 한 기사의 결론은 새내기독자를 겨냥하며 “쓴소리도 약이다”로 이어진다. 같은 기획 중 다른 기사는 교수의 코멘트를 통해 소위 ‘꼰대’비판 현상을 “자존감에 상처 입기 싫은 학생”들의 문제로 호도한다. 이들이 “반성하기보다는 지적한 사람을 ‘꼰대’라 칭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다고.

지난해 문제가 되었던 서울예대의 “똥군기” 피해자 앞에서, 혹은 선후-후배 관계가 가해자-피해자 관계가 되어 발생하는 수많은 성폭력 사건들 앞에서 저 설명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꼰대질’은 말이 아니라, 불평등 하게 분배된 말할 수 있는 권력의 문제 아닐까. 꼰대질이 발화되는 곳의 권력관계와 ‘꼰대질’의 성격을 하나하나 들여보는 일들이 필요하다. “개인화”를 지적하며 ‘공동체’의 복귀를 말하는 일은 무엇도 바꿀 수 없는 봉합에 지나지 않다. ‘꼰대’질은 보았듯이 비단 말 뿐 아니라 물리적 폭력, 통제와 감시의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교육의 이름으로 달기도 하며, 언제고 그 기저에는 신화화되고 동시에 미성숙한 이들로 ‘관리 받아야한다’는 새내기에 대한 상(image)이 존재한다. 이는 질책에 반문하는 “개인화”된 ‘후배’의 문제가 아니라, 새내기와 대학생에 관해 끊임없이 말해온 사회의 문제, 사회적 담론과 이미지의 문제, 대학사회 내부의 남성적 문화의 문제 일 것이다.

실존하는 권력구조 앞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쉽게 답할 수 없지만, 올해 주목할 만한 기획이 중대 신문에 등장했다. 2017년 2월 26일 발행된 3편의 기획기사는 위치선정과 대학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권력구조, 새내기의 불안정성과 새내기 상(image)을 고려한다. 해당 기사들은 문제 상황으로 <변하는 시대 속 변치않는 악습>을 지적하며, 강요된 친목 등을 문제의 상황으로 제시한다. “신입생을 맞이하는 재학생들의 시선에는 신입생들이 어린아이로 보이는 모양이다”하는 문장에서는 새내기의 상(image)에 대한 통찰 역시 보인다.

모든 이해는 오해

학내언론이 신입생(혹은 후배)과 선배의 관계에 접근방식을 바꾼 것을 두고 지나친 의미부여는 불가하다. 대학사회는 여전히 특별한 것으로 ‘새내기’를 주문처럼 읊는 중이다. 이들은 담론의 중심인 동시에 대학 내 폭력과 억압의 중심이다. 후자를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자가 만들어내는 새내기에 대한 상(image)과, 그 상상에 기대어 우리가 행하는 실천들을 다시 되돌아보는 일은 필수다. 물론 새내기 내부의 이질성에 대한 고민 역시 함께 해야 하겠지만.

쉽게 ‘요즘새내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시작이다. 새내기들이 개인화되었다고? 그 이야기는 90년대 신세대 등장 이후 줄곧 제기되어 왔다. 일례로 1999.0325. 경향신문 <동아리 구인난 새내기영입 ‘비상’ – 대학가 동아리 신입회원 급감 대책고심>기사는 정확하게 “개인화”를 지적한다. ‘요즘 새내기’들은 공부만 한다고? 그 요즘은 언제를 가리키나? 1993년? 1993년 5월 11일 한겨례에 실린 기사 <젊음의 광장 속 대학풍속 바꾸는 새내기 현상 도서관 ‘점거’ 영어회화 열기>의 내용은 정확히 이에 부합한다. 당신이 지금 행하고 있는 새내기에 대한 ‘정의’는 새내기들을 ‘특이’하고 ‘이질적’존재로 묘사해온 유구한 역사에서 전혀 이탈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정의’들이 상상의 새내기를 구성해냈고, 오늘날 새내기를 향한 폭력에 동조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 마주한 난점은 ‘우리 모두가 ‘새내기’를 지닌다는 데 있다. 대학생 내부에서 새내기에 대한 이해는 ‘지나쳐온 시기’라는 경험으로 담보된다. 때문에 “나도 겪어봐서 아는데”라는 말은 쉽게 누군가의 새내기에 관한 발언권을 허락하고, 자주 반론을 소거하기 위해 사용된다. 대학생 모두는 진정 각각의 ‘새내기’를 지니고, 어떤 의미에서 모두가 새내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매일 경험한다. “모든 이해는 오해”라고. 나의 새내기는 그저 ‘대학 첫 해’라는 시간의 양으로만 누군가와 일치한다고. 우리는 젠더도, 계급도, 지역도, 모두 다른 환경에서 왔다고. 우리가 나름으로 지닌 “새내기”를 통해 누군가를 이해하고 있다 생각하면, 그것은 필연 오해라고. 나의 이해가 오해라고 생각해보는 일. 이 지나치게 단순한 명제는 출발이다. 새내기를 너무 쉽게 새내기라고 말하는 우리에겐 잠깐의 멈칫함이 필요하다. 아. 물론, 더 직접적인 담론주체들은 다른 차원의 고민을 해야한다. 다른 차원의 고민을 해야한다. 마치 중대신문이 보여준 변화처럼. ‘요즘학생의 개인화’를 거론하며, “대학 내 남성적 문화”를 탈각시킨 채, 실존하는 폭력 속에서 새내기의 절규를 손쉬이 “공동체”, 혹은 “선-후배”로 봉합하는 일, 그곳에서 단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분명하다. 우리는 “새내기”를 알았던 적이 없다.

Notes:

  1. 분화된 청소년의 상(image)에 관한 논의는 전상진의 논문 <청소년연구와 청소년 상(image)>을 통해 더 쉬이 파악 가능하다. 청년세대론의 억압적 성격의 경우 김선기의 2015년 논문 <’청년세대’ 구성의 문화정치학>을 통해 개괄할 수 있다.
  2. 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은 [나이주의와 청소년 인권]이란 제목의 연재를 진행중이며, 격월간 교육전문지 <오늘의 교육>은 지난해 9월 [나이주의를 넘어]라는 이름의 특집을 다뤘다.
  3. 영국정치학자 화이트는 다른 문제일 수 있는 것을 “세대”의 틀로 접근하여, 세대의 효과를 과장하는 경향을 ‘세대주의’(generationalism)라고 명명한다.
  4. 2013년 경영경제대학 입학식의 동문회장 축사 중에서
  5. 청년에 대한 포괄적 지원을 추진하는 청년기본법이 각 정당을 통해 발의된 것은 2014년 이후다. 그 전까지 청년 정책 및 법률은 청년고용지원법 을 필두로, 경제적 측면에 국한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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