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S] 나를 또 아끼면 네 얼굴을 발바닥에 새길 거야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얼굴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신체부위가 은밀하다 여겨졌는데 마치 몸이 덩어리 채 포르노가 된 기분이었다. 가시성에 상관없이 목부터 발바닥까지 섹슈얼하지 않은 부위가 없었고 타인이 그렇게 규정짓는 순간 내가 내 몸에 해왔던 결정은 놀랄 만큼 쉽게 상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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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자바

바리캉마냥 시끄럽게 돌아가던 바늘이 살을 찌르는 순간은 묘사만큼이나 유쾌하지 못하다.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다. 어느 날 우연히 본 타투 도안이 맘에 들었고 그래서 했다. 근 몇 년간 제일 하고 싶었던 동시에 육체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을 막 끝낸 나는 고인 피를 닦으며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거울로 비친 잉크 자국을 몇 번이나 다시 바라보면서 몸 위 선명히 새겨진 검정색 글자를 만져본다. 어깨에 두 줄의 이야기가 생겼고 옷을 갈아입을 때 마다 전체 줄거리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타투를 결심한 건 꽤나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여태껏 시간을 끌어온 데에는 나름의 시시한 이유들이 있다. 처음엔 단순히 아플까봐 하지 못했고 한동안은 그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 사이 의도치 않게 다수에게 타투계획을 밝힐 기회가 있었고 종종 묘하게 치졸하지만 굉장히 익숙한 상황들에 놓여왔다. 반응은 대게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타투는 좀 그래’와 ‘여자는 좀 그래’로 개 중에도 전자는 후자보다 상당히 드물었다. 전자의 경우 정말 별다른 의견이 없어 아무렇지 않았거나 편견이 수용되는 사회자체를 비판하는 식으로 우회하기도 했다. 같은 사회에 살고 있는 나는 그래서 그 이해들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딱히 나에게만 부당한 일이라 여기지 않았다.

문제는 전자가 그에 일단락되지 않고 쉽게 후자로 이어질 때였다. 그 흐름의 찰나는 그 많던 전자 각자의 논리들을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하나로 모았는데 식상한 만큼 간단한 방법인 ‘창녀’ 혹은 ‘쌍년’ 만들기가 그 귀결의 종착지였다. 이는 여성에 금할 몇 가지 낙인들을 정해놓는데 이때 주위 맥락은 통째로 무시한 채 해당 행위가 곧 문란이나 탈선을 의미하도록 하는 일방향의 전개가 기본이다. 타투라는 낙인이 순식간에 나를 지나치게 성적이고 적개심으로 가득한 ‘년’으로 만드는 것이다. 몇몇은 그러한 본인의 인식이 차별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 듯 애써 뿜어져 나오는 촌스러움을 감추려 ’나는 너를 아끼니까‘ 따위의 충고쯤으로 포장했다. 시간이 지나고 실은 그게 남성 고유 혹은 타투가 분류하던 ’강한‘ 남성 영역으로의 도전에 대한 경고라는 걸 깨달았지만 그때의 난 어쩐지 아낌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에 자유롭지 못했다. 여자인 것은 내가 몸이라는 개인적 영역에서 주체로써의 권리를 스스로 내려놓을 수 있는 좋은 변명이 되었다.

결국 다 필요 없고 내 갈 길을 가리 결심한 후 도안을 완성했을 땐 더 이상의 번외는 없다 여겼다. 그러나 뒤늦게 타투를 올릴 부위를 고르면서 살면서 처음으로 내게 이토록 ‘은밀한’ 곳이 많다는 걸 말 그대도 ‘온몸’으로 느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얼굴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신체부위가 은밀하다 여겨졌는데 마치 몸이 덩어리 채 포르노가 된 기분이었다. 가시성에 상관없이 목부터 발바닥까지 섹슈얼하지 않은 부위가 없었고 타인이 그렇게 규정짓는 순간 내가 내 몸에 해왔던 결정은 놀랄 만큼 쉽게 상실되었다. 잘 보이지 않는 곳은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이란 타인을 위한 명목으로, 잘 보인다면 그건 나의 낙인을 ‘모두가 볼 수 있게’ 전시하는 공간으로 불리면서 타투는 좀처럼 자기 자리를 쉽게 찾지 못했다.

이 경험은 그간 가까운 만큼 당연하던 당사자성 그 이면의 내 몸을 마주하게 한다. 우스웠던 건 그런 나 역시 다른 여성의 몸 온갖 곳에 지정 되 온 정의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해서 내 신체 모두를 은밀하게 여기던 그들이 나와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라고 느끼데 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여기서 가해의 주체는 성별을 가리지 않고 실질적인 권력을 쥔 쪽과 그에 상충하는 피억압자 모두에게 자리를 열어놓는다. 여성인 내가 몸에 하는 선택들은 대게 남성시각의 기호에 의해 결정되고 이는 남성중심문화와 자본주의가 만든 미디어의 일환이다. 그 안에서 단지 내가 여성으로 규정되었고 이에 내려지는 주체의 시선 대부분이 관음을 표상하고 있을 뿐이다.

신체로 존재하는 것만으로 채팅방 안에서 ‘줘도 안 먹거나 주면 먹을’ 쓰레기 철학의 먹이단계에 끼워지고, 가축마냥 가슴으로 등급이 정해지는 건 이제 너무 뻔해 무표정으로도 읽을 수 있다. 디즈니 공주의 코르셋을 거부한들 토플리스 사진을 찍는 땐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던 ‘미녀’의 앞선 주장들이 모순적이라는 비난이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한다. 그녀의 말만 따라 “내 가슴이 페미니즘과 무슨 상관”인지 알 길이 없다. 나의 가슴을 섹슈얼하다 이야기하는 게 내가 아니라 타인인 너라서 불편하다. 쓸데없는 애정을 담보로 쏟아내던 그 아낌의 근원이 사실 나를 후려치기 위함이라는 걸 너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당시의 네가 그 충고에 일말의 자격도 없다는 걸 알게 된 지금, 나는 반대쪽 어깨에 삽화를 넣을 준비를 다 마쳤다.

4 Responses

  1. 어깨에힘빠진인간

    “나의 가슴을 섹슈얼하다 이야기하는 게 내가 아니라 타인인 너라서 불편하다.”

    남녀를 불문하고 (남성 쪽으로는 “나의 복근을/남근을 섹시하다 말하는 게 내가 아니라 타인이라서 불편하다” 등등의 변주가 가능) 이런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여 도달하는 종착역을 결국 고립이고, 많은 이들은 고립 상태에서 외로움에 시달리게 되지요.

    ‘너(타인)’ 의 시선, 너의 말 등등에 스트레스를 받는 타입의 사람들은 그만큼 타인을 많이 신경쓰고 있는 셈입니다. 타인을 신경쓰고 있으니까 그들의 시선, 그들의 말에 심적 영향을 받는 거지요. 내가 타인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내가 타인의 맘에 안 들면 어쩌나 하는 불안은 주체가 불안에 잠식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한 기제가 작동하여 종종 그 ‘타인의 마음(욕망)’ 에 대한 적개심으로 둔갑하곤 합니다. 적어도 내가 그 적개심을 불태울 수 있는 동안에는 불안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적개심으로 모든 적을 다 퇴치하는 데 성공했을 때 홀로 남은 ‘나’ 는 깨닫습니다. 내 마음이 애증이었음을.

  2. 어깨에힘빠진인간

    보통은 홀로 남을 일이 없습니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내 생각 내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게 마련이니까요.

    ㅡㅡㅡㅡㅡㅡㅡ

    대체로 사람들이 실제로 자기 신체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경우는 드뭅니다. 타투하고싶으면 할 수 있습니다. 타인들은 단지 거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할 뿐이지, 실제로 나를 잡아가둬서 타투 등을 (내가 내 몸에 하고싶은 행위를) 못하게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내가 살인 강도라도 하는 게 아닌 이상에는요.

    내 몸에 대해 내가 아니라 남이 왈가왈부 하는 게 싫다, 내 가슴을 성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게 내가 아니라 타인들이라서 싫다, 내 근육을 성적 매력을 풍기는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이 타인들의 시선이라서 불편하다, 이런 얘기에 등장하는 불편은 그래서 내가 실질적으로 내 신체에 뭔가를 하지 못하게 구속하는 뭔가가 정말로 있어서 생기는 불편함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타인들의 욕망에 신경 끄지 못하는 내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타인의 욕망에 계속 신경쓰고, 통제되는 타인의 욕망에 신경질을 내는 이유는 내가 타인의 욕망에 부합해야만 타인으로부터 애정-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생각이 불안을 만듭니다. 내가 타인의 욕망에 부합하지 못하면 애정을 받지 못하리라는, 버림받으리라는 불안. 그래서 한 편으로는 타자의 욕망에 부합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타자의 욕망에 대고 화를 냅니다. 왜 그딴 걸 원하느냐고. 왜 그런 욕망을 갖고 있냐고. 그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할까봐 불안하게시리. 학별 좋은 사람을 욕망하지 말아요, 나는 서열 높은 대학 못 갈 것 같으니까. 날씬한 여자를 욕망하지 말아요 , 나는 날씬해지지 못하니까. 돈 잘 버는 남자를 욕망하지 말아요, 나는 돈 잘 못 벌 것 같으니까. 잘생긴 남자를 욕망하지 말아요, 나는 못생겼으니까. 애교있는 여자를 좋아하지 말아요, 나는 애교 따위 부리기 싫으니까.

  3. 어깨에힘빠진인간

    내 가슴을 성적으로 쳐다보는 것도, 아니 애초에 나를 응시했던 것부터 언제나 이미 “너” 였습니다. 그리고 그게 우릴 옭아매는 것도, 불편하게 하는 것도 늘 그랬습니다. (한 때는 동그란 얼굴이었고, 지금은 갸름한 얼굴로 바뀌었을 지는 몰라도요.) 내가 너를 신경쓰지 않게 되지 못하는 한, 그 불편함은 그림자처럼 늘 곁에 있을 거예요.

    나는 나를 봐 주는 타자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내가 봄으로서 확고해집니다. 나의 기원이 타자의 시선에 있습니다. 타자의 시선에 얽매이는 것은 그래서 나 자체를 잊지 않는 한 불가피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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