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조금은 이르게 아파했을 당신에게

그렇게 막연한 당신과 나 사이의 장막을 한겹씩 벗기고 나면, 못할 게 없어져서 씩씩 에너지가 올라간다.

l연두부

지평선을 넘으면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새로운, 다른, 특별한’과 같은 막연한 수식어들을 쫓아왔다. 넌더리가 나서. 같은 이야기를 맴도는 듯한 수업들과 술과 술로 ‘당신’을 덮어버리는 내가 실증이나서. 하루를 마무리하며 뒤적이는 페이스북에서 a는 a를 이야기하고 b는 b를 이야기하고 나는 오롯이 상대와 닿지 못하는 감정들이 괴로워만져서.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급급히 맺어진 관계들을 쉬이 끊지 못하는 것이 못내 미련스러워서.

언제나 그렇듯 새내기가 된다는 것은 낯섦과 동시에 설렌다. 조금 더 괜찮아진 내가 다시 캔버스 위에 ‘우리’를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래서 어색한 공기와 침묵에도 인사를 건냈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지만, 금세 상대와 나 사이의 벽이 보인다. 이 곳에 와서 매일 되내인 말은 ‘씩씩하게’다. 아무것도 모르는 막막함과 동시에 삶을 다 알아버린 듯한 무기력함 속에서도 내던져진 하루를 헤쳐’나아가야만’ 하니까. 걸어야 하는 시간들은 나를 쫓아오고, 내것이지만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닌 공간 안에서도 나를 잃지 않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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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했다. 수업 중 당연하게 질문을 던지는 교수님과, 손을 들어 먼저 답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내 경우 질문을 받으면 ‘완전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고 타인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두려운데 여기선 교수님이 질문하면 학생들이 내 기준 뭐 저렇게 답하지? 싶은 것도 당당히 말하고, 말하다가 생각이 정리가 잘안되면 그냥 얼버무린다. 심지어 I/we don’t know라고 답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려웠다. 80% 이상의 미국인을 기준으로 진행되는 영어 수업도, 질문에 답해야하는 분위기도 나를 부담스럽게만 했다. 친구관계를 맺는 것도 한국과는 확연히 달랐다. 모르는 사이여도 항상 웃으며 일상을 묻고, 이야기 중 잘 끼어들어 자신을 말할 줄 아는 (넌씨눈이 되어야했ㄸ..)사람이 되어야 했다. 처음보는 친구가 로마에 대해 묻는다면

“oh, Rome is wonderful city, I wanna go there! When do you go? I’d like to in! how about going there together?” 라고 하는 마인드가 내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문화에 익숙치 않은 비영어권 외국인이자 아시안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은 스스로를 움츠러들게 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포기했다. 학교를 중심으로 이곳의 관계를 한정시키지 않기로 했다. 외국인들과 여행을 떠나고 오픈 마인드로 모두와 친구가 되는 나만의 교환학생 판타지를 그냥 판타지로 남겨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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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테이션에 안갔고, 학교에선 억지로 할말을 쥐어짜지도 않았다. 대신 20분 남짓 걸리는 영화관까지 걸어갔고, 라라랜드는 비록 이탈리아어 더빙이었지만 즐거웠다. 그래도 큰일 나지 않았다. 또 여행 가야한다는 강박도 버리고, 무엇하나 더 담아와야 한다는 생각도 버렸다. 나는 게으르고 집을 좋아하니까 흐드러지게 늦잠을 자고 집 앞 LIDL에서 장을 봐서 정성스레 나를 위한 요리를 했다. 전공 수업을 드랍하고 drama수업을 넣었다. 괜찮았다. 그래도 세상 안무너졌다.

“Sorry, English is not my mother tongue.”

그리고 솔직해지기로 했다. 모르면 모르는대로, 알면 아는대로 말했고 그게 있는 그대로의 나니까 일단 편해서 좋았다. 그 이후의 판단은 상대에게 있으니 부담도 없었고, 일단 나를 드러내놓고 나면 교수님/상대도 나에게 얼마나 다가와야하는지 알게 된다. 그렇게 막연한 당신과 나 사이의 장막을 한겹씩 벗기고 나면, 못할 게 없어져서 씩씩 에너지가 올라간다. 그래서 동시에 상대도 솔직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서로 부담없이 제안하고 이야기나누는 것 같다. 한국에서 나는 거절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 나누고 싶은 것이 있어도 선뜻 말꺼내지 못했는데, 그러다 보니 아예 혼자하는 것마저 미루게 되서 나를 잊고 지냈던 것 같다. 이젠 읽고 싶은 책도 생기고, 가고 싶은 곳도 생겼다. 내 감정이 멍청할지라도 솔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로 했다.

연수2

그래서,
전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행복해집시다 우리. 각자 솔직해지고 씩씩해져서 아끼는 사람들을 더 많이 알아가도록 합시다. 잠토끼인 저의 올해 고민들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당신을 알아가고 이해할 수 있을까’ 입니다. ‘지극히 다르고 개인적인 당신의 서사를, 절절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입니다. 서툴지라도, 이 길이 어디로 가는 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걸어갔으면 합니다, 바로 지금, 조금은 이르게 아파한 당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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