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S] 당신은 차별에 찬성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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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연

어느 한 토요일 광장, 일렁이는 촛불 속에서 무대 위에 올라가 사회적 부정의를 호소하는 목소리와 이에 응답하는 사람들의 외침을 지켜보며, 나는 무대 위에 올라선 내 모습을 그려본 적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성소수자입니다.” 외침 대신 정적이 자리한 그곳, 점점 커지는 사람들의 웅성거림만이 귓가를 맴돌 뿐이다. 머릿 속에서 장면은 그대로 멈춘다.

 2011년, 학생들이 필수로 수강해야 했던 대학교 교양 수업의 토론 주제는 ‘동성애 찬성/반대’였 다. 이후 이 질문은 다른 수업에서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한 찬성/반대’, ‘동성 부부의 양육권 허용’ 등 변주된 형태로 반복되어 등장하곤 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동성애는 죄악이기에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말했고, 어떤 이는 ‘동성애를 허용할 경우 출산율이 저하되며, 인류 재생산에도 문제가 될 것’이라며 ‘동성애 반대’에 힘을 보탰다. 다른 한편에서 어떤 이는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러한 문제 설정이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치 그 자리에 ‘동성애’를 실천하거나 ‘동성애자’로 정체화한 사람이 없다는 듯이, 모두 가 이성애자이자 동시에 재판관으로 자리했던 그곳에서 논의는 진전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았다.

 그리고 거기, 아무 말 없이 고개도 들지 못하고 그저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며 벌벌 떠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인’이 되었고, ‘인류에 도움도 되지 못 하는 비인간’이 되었다. 그 사람, 나는 붉게 달아오른 뺨을 식히며 제발 나를 보는 사람이 없기를,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를 기도했다. 대학 시절, 내가 소속되었던 ‘여자’ 대학이라는 공간에서는 여기 있는 ‘우리’ 모두 ‘이성애-여성’ 이라는 암묵적으로 합의된 약속이 존재했었다. 머리카락만 짧게 잘라도, ‘여성스러운 스타일’(존재하지 않지만 우리 머릿속에 느슨하게 각인된 이미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움찔거리고, 놀라고, 놀리고 웃었던 그곳에서 나도 같이 움찔하고, 놀라고, 놀리고, 웃었다. 아파하면서, 내가 나를 놀리고 웃었다. ‘동성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하다며 정색하는 친구 앞에서 혹은 동 성애는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친구의 말에 바보처럼 허허 웃음을 흐리며 입을 닫았다. “우리는 ‘동성애자가 아니어서’ 다행이야”라는 말이 우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세계에서 나는 “그래, 아니어서 진짜 다행이야”라고 답했다.

 졸업 후, 나는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되었고, 또 다른 ‘우리’를 만나게 된다. 새로운 공간에서 만난 익명의 존재에게 나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이야기하며, 지난했던 경험들을 새벽까지 떠들었던 최초의 접촉을 기억한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함께 피켓과 촛불을 들고 부정의에 저항하는 구호를 외쳤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지금 나는 지난 시절의 ‘우리’가 같이 (비)웃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모습으로 나는 나 자신을 벌하지 않게 되었고, 그 모습으로 나에게 부착되었던 의미들, 의미를 둘러싼 구조적인 문제들을 질문한다. 지난 시절의 ‘우리’가 움찔하고, 놀랐어야 했던 것은 ‘우리’ 머릿속에 박힌 편견과 혐오였다는 것, ‘우리’의 얼굴이 (우리일 수도, 우리임에도 불 구하고) 우리가 아니어야 하는 ‘타자’라는 이미지를 모멸하는 비열하고 우스운 얼굴이었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그 모습으로, 그 어느 때보다 내 의지로 살아가고 있음을 감각한다.

 “동성애를 찬성하십니까? 혹은 반대하십니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이 질문을 접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학교 수업이었을 수도 있고, 우연히 본 시사 프로그램 혹은 자주 이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일수도 있다. 당신은 이 질문에 불 쾌감을 표하며 왈칵 화를 낼 수도 있고, 사뭇 진지한 태도로 ‘동성애 찬성/반대’의 입장을 취하며, 입장을 뒷받침할 논거들을 곰곰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은 반대하지만, 동성애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어지러운 말을 뱉을 수도 있다.

 동성애에 대한 찬/반 논쟁은 매우 문제적이다. 일반적인 사회적 의제들과 달리, ‘동성애에 대한 찬성/반대’는 (동성애로 등치된) 동성애자라는 주체 자체를 포함/배제할 것인가에 집중된다. ‘동성결혼 합법화’와 같이 보다 정제되어 보이는 질문 또한 ‘이성’ 관계에는 (고민 없이) 주어진 권리들이 ‘동성’ 관계에게는 고민의 문제가 된다는 점, 다시 말해 섹슈얼리티에 따른 권리의 불평등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별을 내포하고 있다. 성소수자의 삶의 결들을 지워 내고, 마찬가지로 ‘동성애’의 다양한 끌림을 ‘비정상적’ 성적 행위로 축소시키는 것은 성소수자를 인간으로 상상하지 않음으로써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폭력에 무감하게 만든다.

 나아가 (이성애라는 명명조차 필요 없는) ‘보편적’ 사랑/동성애라는 이분화된 구도는 두 범주로 포착할 수 없는 다양한 주체들을 간과한다. 언제나 이성애는 질문할 필요가 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이러한 의제 설정 뒤에 숨겨진 이성애 중심의 권력 체계를 은폐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다시 말해, ‘성적 지향 및 성별정체성’이 ‘한국사회를 문란하게 만드는 일탈자이자 변태인 동성애자’라는 종(種)으로 등치되는 것은 이성애적 주체 및 관계 역시 성애적(sexual) 이라는 것을 간과할 뿐만 아니라 관용의 주체로서의 ‘이성애자’―관용의 대상인 ‘동성애자’라는 위계적 질서를 가려버린다.

 

 2017년 4월 25일, 많은 사람들이 스크린 너머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동성애 찬성/반대’를 이야기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국민’에 대한 약속을 이야기해야 했을 자리에서, ‘동성애’(기실 섹슈얼리티에 따라 범주화한 특정 집단)를 ‘반대’한다는 언설을 ‘정치적 견해’로 이야기한 문재인 후보의 모습은 함께 지키고 보호해야할 인권적 가치 및 규범과 달리 (동성애자로 축소 및 왜곡 된)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를 승인하는 역설을 보여주었다.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인권을 둘러싼 논의가 여전히 ‘동성애를 지지하는가’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사람들에게 ‘논쟁’으로 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며, ‘마음이 갈기 갈기 찢어진다’는 표현을 온 몸으로 감각하였다. 고민해야 할 것은 ‘동성애 찬성/반대’가 아니라 누군가를 지지할/지지하지 않을 것인지를 고민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점하고 있는 ‘당신’의 자리, ‘당신’, 계속해서 이성애/동성애 이분법적·위계적 질서를 생산 및 재생산하는 구조적 맥락이다. 그렇기에 나는 질문을 바꾸어 보고 싶다. 당신은 차별에 찬성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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