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S] 광장의 두 얼굴, 서울시가 허락한 것/허락하지 않은 것

ㅣ조윤

ⓒ중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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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3일 토요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한국교회동성애대책협의회 주최로 진행된 ‘세계 가정 축제’에 다녀왔다. 한 개신교 매체는 세계 가정 축제를 “첫 대규모 반(反)동성애 축제”라고 소개한 바 있다. 서울역 버스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멀리서 애국가가 들려왔고, 소리를 따라가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서울역 광장이 보였다.

‘동성애를 막아 생명―가정―효의 연결고리를 지켜야 한다’는 소강석 목사(새에덴 교회)의 연설로 시작된 ‘축제’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턱시도를 입은 ‘남자’가 무대 위로 올라와 손을 맞잡고, 하트 모양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하였고, “정직한 마음”, “Love”, “모든 중독 NO”등의 문구가 적힌 종이를 손에 든 청소년들이 앞으로 중독에 빠지지 않겠다, 동성애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교회 청년 대표가 현대 사회에 만연한 성에 대한 유혹에 맞서 결혼 전까지 순결을 지키겠노라 맹세하였다. 이들의 퍼포먼스와 발언이 끝날 때마다 이 곳을 가득 매운 사람들은 박수로 화답하고, “아멘!”을 외쳤다. 혼인과 가정을 예찬하며 웃음과 기도를 나눈, 짐짓 평화로워 보이는 이 곳을 둘러싼 바리케이드에는 “동성애는 인권이 아니다”, “군형법 제92조 6폐지 절대 안 돼”와 같은 문구가 적힌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다. “생명 존중”, “행복 가정”, “자녀 사랑”, “부모 곤경”을 외치는 그 입으로 “동성애”, “음란문화”, “낙태”라는 구호에 “노!”를 외쳤다. 첫 번째 일정을 마친 이들은 서울역 광장에서 시청을 지나 다시 서울역 광장으로 돌아오는 퍼레이드를 진행하였다. 이들의 퍼레이드는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퍼레이드 밖의 “시민”들을 향해 ‘동성애는 중독이며, 질병’이라는 구호를 목소리로 들려주고, 활자로 보여주었다. 서울역 광장의 얼굴들은 ‘평범한’ 얼굴들이었다. 어쩌면 어디선가 지나쳤을 수도, 어쩌면 서로의 이웃이었을지도 모를 ‘평범한’ 얼굴들. 그 평범한 얼굴들을 보며 나는 6월 3일 이 시간, 내가 있을 수도 있었던 또 다른 공간을 떠올렸다.

ⓒ퀴어문화축제

ⓒ퀴어문화축제

2017년 2월 28일,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서울시에 6월 3일 토요일 서울광장 사용을 위한 사용신고서를 제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2016년부터 “서울광장에서의 불건전한 행사를 막아달라”는 시민들의 청원을 반영하여 “「서울특별시 서울광장의 사용 및 관리에 관한 조례」 제 6조에 의거, 광장의 사용목적에 위배되거나 다른 법령에 따라 이용이 제한되는 경우 ‘열린시민광장위원회’ 의견을 들어 수리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답변한다.

광장, 그리고 도시는 사람들을 담고 있는 단순한 물질적 환경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자본,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지역, 국가 등에 따른 권력과 차이가 교차되어 조직되는 것이며, 동시에 이러한 권력을 재생산하는 정치적 장이다. 이러한 도시에서 주체의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따라 도시 일상의 경관은 다르게 나타난다. 예컨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꾸미고, 사랑하는 연인과 손을 잡고 길을 걷는 것과 같이 누군가에게는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적 행위이지만 퀴어한 주체들에게는 “공간상에서 자신을 얼마만큼 드러내고(혹은 강제로 드러내지고) 또 감출 것인가(혹은 타의로 감춰질 것인가)”(김현철, 2015: 22)를 일상으로 경험한다. 그렇기에 퀴어문화축제가 진행되는 단 하루, 광장의 시간은 주체로서의 퀴어를 위한 시공간이며, 동시에 ‘탄생, 결혼, 출산, 자녀 양육, 죽음’이라는 이성애적 질서로 규정된 생애 시공간을 균열 내는 수행이다. 나아가 퀴어문화축제는 기존 이성애―이원젠더 규범과 제도에 퀴어를 인정해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이성애―비트랜스젠더건, LGBT/퀴어건, 트랜스젠더퀴어건 이들 모두가 퀴어 이슈에 연루된 존재임을 깨닫도록 하는 정치행위”(루인, 2015: 322)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된 ‘자신’들의 사랑을 위해 ‘동성애’를 악마화하고 혐오하는 ‘세계 가정 축제’와 존재의 출현을 통해 부정의에 저항하는 퀴어문화축제, 서울시가 허용한 것과 허용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이는 ‘단지’ 광장의 허용/불허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동성애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동성애 ‘차별’은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두 문장의 간극은 여전히 차별을 차별로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다. 더 정확히는 무지해도 되는 권력적 위치다. “차별”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어야만 “차별”이라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열린 광장’이 사실은 ‘누구에게만’ 열린다는 것, 누군가의 혐오는 축제로 용인되면서, 누군가의 축제는 ‘불건전함’으로 왜곡된다는 것. 이 또한 차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알아야만 한다.

2016년 늦은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광화문 광장에서 ‘우리’는 함께 촛불을 밝혔다.

그리고 여전히 꺼지지 않은, 아직 남아있는 촛불들이 있다.

 

 

참고ㅣ

김현철(2015), “성적 반체제자와 도시공간의 공공성-2014년 신촌 퀴어퍼레이드를 중심으로”, 『공간과사회』, 제25권 1호, 12-62쪽.

루인(2015), “퀴어문화축제와 LGBT/퀴어를 향한 기독교 근본주의 집단의 언설을 다시 생각하기”, 『실천문학』, 제119호, 317-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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