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낭만에는 낭만이 없다 – ‘로맨틱’이라는 말의 폭력성에 대하여

ㅣ우연

  “그냥 들어만 주는 거 어려워. 나는 남자잖아. 뭔가 해결해주고 싶다고 본능이.” “알았어. 그럼 그건 여자랑 할게. 그냥 들어만 주는 거. 우린 잘하거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남자의 본능이다. 동시에 이런 본능은 로맨틱한 것이다. “근데 지금 어떻게 됐어?” “자존감 바닥이야. 겁나. 어, 이거 여자 짓이야. 어우 내가 이 상황에서 여자 짓을 한다. 위로받고 싶어서.” 힘든 일을 겪고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것은 ‘여자 짓’이다. 이는 드라마 ‘사랑의 온도’에서 온정선(양세종)과 이현수(서현진) 사이에 오간 대화 중 일부이다. 눈물 흘리는 여주인공과 그 눈물을 닦아주는 남주인공, 위기에 처한 여주인공과 그런 그녀를 구해주는 남주인공. 이와 같은 설정은 우리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의 안정감을 준다. 반대로 이 성 역할이 역전되면 무척 불편하고 ‘unromantic’ 한 상황이 된다. 섹슈얼리티를 ‘본능’의 차원에서 생리적인 것, 자연적인 것으로 이분화하여 그 차이의 극대화하는 것, 이는 로맨틱 성을 획득하기 위해 드라마나 예능에서 흔히 취하는 전략이다. 그렇다면 과연 로맨틱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우리는 왜 이토록 로맨틱에 열광하는 것일까?

  오늘날의 사랑은 과거의 사랑- 결혼이라는 목적지를 위한 경유지로 남자와 여자, 양 성 간의 사랑이 당연시되었던-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즉, 더 이상 사랑이 결혼을 위한 사전 단계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연애를 위한 연애가 전혀 이상하지 않고, 우리는 여성의 몸과 섹스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성,사랑,결혼 일치의 매커니즘이 요구하는 ‘순수’ ‘영원성’ ‘정신성’ ‘마음’과 같은 단어들이 여전히 그리고 꾸준히 ‘로맨틱’성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큰 변화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과거에는 무엇을 박탈당했는가에 대한 인식이라도 남아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의 성(sexuality)은 올바른 사랑을 가장한 낭만이라는 이름하에 가려지고 통제된다.

서현진ⓒ 드라마 <사랑의 온도>

  ‘로맨틱’ 성이란 낭만적 사랑의 실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서사로, 로맨스에 대한 환상 -낭만적 사랑은 성적인 사랑이지만, 관능의 기술은 포함하지 않는다 1-으로부터 발현된다. 이러한 낭만성의 서사는 능동적인 남성성과 수동적인 여성성의 결합-정복당하는 대상과 정복하는 주체로, 선택받는 대상과 성취와 장애의 극복이라는 남성적 세계 속 선택하는 주체로-에서 구현되는데. 이는 관능의 기술이 특정 여성의 분야로 한정되면서 섹스어필을 담당하는 여성 또는 성적 욕망을 가진 여성과, 성적 행위에 참여는 하지만 성적 욕망은 가지지 않는 무성적 이미지의 여성이라는 이분화를 통해 극대화된다. 이와 같은 이분법은 여성을 미화하면서 단상 위에 세운 동시에 남성들에게는 용맹과 명예에 부풀어진 자신을 과시하며 단상을 향해 달려갈 것을 요구했다. 2 따라서 여성은 남성의 절대적이고 헌신적인 구애로 선택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남성은 강인함을 바탕으로 여성을 구매해야만 하는 존재로 규정된다. 즉, 우리에게 부여된 성 정체성은 개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상적 가치나 규범에 따라 마땅히 행동해야만 하는 당위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낭만적 사랑의 성취와 유지를 위해서 요구되는 ‘순수’나 ‘영원성’과 같은 개념이 여성과 남성에게 일련의 행동 양식을 제시함을 통해 알 수 있다.

  ‘여성’의 몸으로 태어나 ‘여성’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있어 요구된 바람직한 행동양식은 “착한 딸”, “어려운 여자”였다. 나는 내 몸이 닳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내 몸을 하나의 재화로 인식하고 나의 손도, 얼굴도, 머리카락도,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나의 모든 신체를 소멸성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나는 내 몸을 깨끗하고 예쁜 새 상품으로 전시하기 위해 늘 고군분투했는데, 상품의 주인이 오기 전까지 더럽혀지지 않게, 헌 것이 아니라 새 제품이라는 설렘을 주기 위해, 상품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게. 국가가 통제하는 섹슈얼리티 상 그대로 나를 감시하고 전시한 것이다. ‘나’의 성(sexuality)임에도 불구하고, 그 통제권은 나에게 없었다. 여성의 몸으로 태어난 순간 나의 몸에 대한 통제권은 국가에 위임되었기 때문이다. “순결을 잃었다” 와 같은 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통용되고, “몸 함부로 굴리지 마”라는 말로 여성을 규제하고 억압하는 우리 사회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결국 사랑이란(여기서 사랑은 ‘낭만적’ 사랑으로 한정한다.) 혼자 하는 것이 아닌 둘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사람만의 여성성 혹은 남성성의 추구로는 실현되지 않는다. 이렇듯, 낭만성에 대한 우리의 환상과 맹목적인 예찬은 여성을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하는 억압적인 기제로 작동하고, 남성을 ‘남성답게’ 규정하는 규율로써 통용된다. 즉, 여전히 그리고 꾸준히 여성들은 순결성, 정숙함에 대한, 남성들은 남자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일련의 무거운 의무감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다.

ⓒ 영화

ⓒ 영화 <연애의온도>


  더 나아가 ‘관능’의 개념을 삭제해버린 낭만적 사랑의 정의는 순수한 관계의 범주에서 벗어난 모든 형태의 사랑-진중하지 않은 연애, 파트너가 바뀔 수 있는 연애, 남녀가 어울린 집단 속에서 피차간 다수의 상대를 만나는 교제-을 진실하지 않은 것이나 문란하거나 위험한 것, 또는 가치 없는 것으로 평가절하한다. 이는 낭만의 범주에 속하지 못한 수많은 종류의 사랑들을 바람직한 사랑의 범주로부터 추방하고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낭만을 최고의 숭고한 기준으로 상정함으로써, 낭만 이외의 모든 나머지 것들을 평가 가능한 가치들로 줄 세우는 것이다. 낭만이란 개념은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낭만을 추구함에 있어 옳고 그름이 있을 수 있을까? 나에게 사랑은 아프고 불안한, 결말이 없는 이야기이다. 누군가에게 사랑은 판단하지 않는 관계 속 교감이고, 또 누군가에게 있어 사랑은 끊임없는 탐험을 통해 발견하는 기쁨이다. 아픈 사랑도, 우리가 외설적이라고 일컫는 그 사랑도, 사랑을 하는 각각의 주체에게는 낭만적이며 그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낭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먼저 말 그대로 ‘낭만’을 ‘낭만으로 착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자발성과 자율성의 신화가 지배하는 일상 현실의 구조 속에서 로맨스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지배적 질서는 개인을 직접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문제로써 상정될 수 없다. 또한, 우리 각각의 개체는 자발적으로 그 억압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기 때문에 문제화되기 더더욱 어렵다. 즉, 사랑의 영역에서까지 저항하고 쟁취하는 일련의 운동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또 그 운동으로 인해 받게 될 무분별한 비난을 묵묵히 감수하고 이겨낼 자신도 없을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우리 모두 너무 지쳤다. 사랑의 감정이 사회적으로 공론화될 만큼 중요한 사안으로써 다뤄질 만한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 사랑을 다루는 목소리 안에서만큼은 비겁하더라도 비합리적인 다른 요소들로부터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것이다. 마치 보지 못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 자발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낭만’이라는 환상에 중독되었다. 기든스에 따르면 중독은 미래를 식민화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개인들이 성찰적으로 대처해야 할 주요 관심사들 중의 하나를 위반하는 것이 된다. 낭만의 힘을 빌려 ‘무’능력을 아름다움의 가면을 쓰고 추구할 수 있고, 마땅히 해야 할 것을 기꺼이 ‘위반’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낭만적 사랑에 기형적이리만큼 열광하는 이유가 아닐까.

대표이미지 ⓒ 영화 <연애의 온도>

Notes:

  1. 앤서니 기든스(2001), 배은경, 황정미 역,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새물결』, p.109.
  2. 에바 일루즈(2013), 김희상 역, 「사랑은 왜 아픈가」, 『돌베게』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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