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공부로부터의 소외

-오늘 여기의 소설 속 대학원생과 시간강사. 

ㅣ구구

 

공부로 부터의 소외

0. 

“이건 사랑일세, 스토너 군”

– 존 윌리엄스. <스토너> 김승욱 옮김

 20세기 초 미주리대학 영문과 학장인 슬론 교수는 농대 4학년 스토너에게 말한다.”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31p). 아. 나는 교육자가 될 사람이었다. 스토너는 아버지의 권유로 농대에 입학한다. “집에서하는 허드렛일 보다 조금 덜 피곤한 허드렛일”(10p)이었던 공부, 허나 필수과목으로 만난 영문학 개론은 뭔가 달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토너는 ‘간판은 농학대학 이지만 영문학에 더 관심이 가는 학생’이 되어 있었다. 이 감정이 무언가요 교수님. 사랑이다. 사랑의 대상이 공부인 이들은 보다 열정적인 구애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한다. 사랑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서일까? 시련은 찾아온다. 텍스트는 읽혀진 바로 그 순간 열매를 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글을 읽고, 다시 써야하는 평생의 과업, 진리를 위한 탐구- 합치를 위한 충실한 노동- 은 사랑의 출발을 선언할 때 시작된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합치의 과업은 시련과 같다. 프랑스의 철학자 바디우는 아비뇽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진행된 대담을 보론한 저서 <사랑 예찬>을 통해 사랑에서 시련이 필연적임을 선언한다 1. 안타깝게도 내가 사랑하는 너는 결코 내가 아니다. 영원의 합치를 바라는 대상이 결코 ‘나’와 하나가 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절망한다(‘네가 이럴 줄 몰랐어’). 절망의 고통은 깊어서 때로는 ‘상처받지 않는 사랑’을 연결해주는 미팅 사이트가 등장하고, 우리는 ‘위기없는’ 사랑을  꿈꾼다. 허나, 바디우에 따르면 사랑의 위기란 그것으로부터 ‘위기’를 제거하려는 동일성의 신화에 있다. 우리 모두가 같은 것을 생각하고, 같은 것을 말하며, 같은 것을 꿈꿀 때 사랑은 위기에 빠진다.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 차이와 다름으로부터 온전히 상처받는 충실성과 그럼에도 계속하겠다는 지속성을 사랑의 매 순간 순간마다 다시 새기는 일이다.

 스토너는 공부에 사랑의 두 조건 -지속성과 충실성- 을 실천한다. 농부의 아들인 그는 온전하게 다름들을 받아들인다. 텍스트는 대지. 씨 뿌리듯 읽고 추수하듯 쓴다. 넘치는 것을 추수하는 일은 불가하다. 그는 언제나 아는 만큼과 읽은 만큼을 쓴다. 대학의 농부는 조바심을 내어 읽지도 않은 이론으로 문학을 재단하지 않는다. 스토너는 ‘여전히 나는 모른다’며 매 해 봄이면 농사를 다시 준비하는 농부처럼 책을 편다. 공부는 계속 된다. 물론 그가 완벽한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공부 바깥의 세계와 언제나 불화했다. 결혼관계에서 아내는 외로웠고, 그는 서재로 숨었다. 물론 둘은 노력했다. 하지만 행복하지 못했다. 그들은 미숙했다. 그리고 비관했다. 스토너는 평생 문학이라는 허구(Mimesis) 뒤에 감춰진 진실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현실이라는 가장(Mimesis) 속에서 진실한 관계를 찾으려는 데에는 회의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1920년대의 이 미숙한 인물의 이야기를 읽으며 감동한다. 불화하더라도 결코 미워하고 증오하지는 않았던 주인공의 심성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차원도 있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 무언가에 충실성과 지속성을 다 하는 일. 나를 모두 바치는 일. 그것의 숭고함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스토너에게는 그것이 공부였다. 그 지속성과 충실성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된다면, 그는 바디우가 설명하듯 무언가를 “구축”했다. 사랑은 결국 어떤 것을 구축해낸다. 그리고 그것은  바디우의 ‘사랑론’에 따르면 공부가 그토고 욕망하는 것을 닮았다.”진리의 모든 과정처럼 말입니다.”(62p)

 

1. 난망한 진리의 구축  # 통제사회 속의 대학

 

“모아둔 돈이 없으면 학위라도 있어야 하잖아.”

-최은영 <한지와 영주>

 오늘- 여기의 소설 속에서 <스토너>와 같이 학문을 사랑하는 일, 그리고 이를 통해 진리를 구축하는 일은 난망하다. 여전히 공부를 사랑하는 이들은 스토너 처럼 열정적인 구애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지만, 이제 충실성과 지속성은 허락되지 않는다. 공부를 둘러싼 조건들이 너무나 달라졌다. 공부 바깥의 모든 것과 불화한 -그래서 서재나 대학원으로 숨었던- 스토너와 달리, 오늘-여기의 소설 속 대학원생은 공부와 불화한다. 최은영의 단편소설 ‘한지와 영주’속 주인공 영주가 이를 보여준다. 그는 대학원에서 지질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다. 그에게 대학원은 “좁은 세계”다. “이미지 관리”가 중요하고, “뒷 소문”을 조심해야 한다. “뒤풀이” 참석이 필수인 세계, 그 속에선 자연스럽던 내 얼굴도 어느새 찡그린 듯 “비대칭”이 되어버린다. 스토너가 공부, 대학, 서재로 숨었다면, 영주는 대학원으로부터 숨는다. 영주는 프랑스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우연히 머물게된 수도원에서 일곱 달을 더 있기로 결정한다. 휴학을 하겠다는 그녀에게 언니는 말한다.

 “네가 대학원에 간다고 했을 땐 교수가 되려는 목표라도 있는 줄 알았어. 그것도 아니었다면 왜 네 시간과 돈을 그런 곳에다 투자한거야? 교수와 동료들이 널 어떻게 보겠니? 너,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모아둔 돈이 없으면 학위라도 있어야 하잖아.” 

128page

 영주가 도망쳐온 대학원이란 이 세계와 동떨어진 특별한 억압적 공간이 아니다. 그보다 대학 바깥의 세계와 같은 법칙의 지배를 받는 -그리고 이 법칙을 아주 잘 체화한-다. ‘한지와 영주’ 속 영주의 가족들은 대학에서 학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모아둔 돈”을 대신해 선택해야하는 것이 학위다. 사회의 시간과 대학의 시간은 같다. 대학원은 취업의 다른 선택지다. 대학원생은 “나이에 걸맞는 옷과 표정을 걸치고서 누구와도 불화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살아야 하는 수 많은 다른 직업군 중 하나다. 그녀는 생애주기로서 “나이”에 알맞게 “옷”을 입고, “표정”을 지어야 한다. 이러한 일상 속에서 주인공의 모든 감각은 무뎌지지만, 어떤 욕망도 불화하는 모습 그대로 펼쳐질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화목한 “표정”과 훌륭한 “옷”을 입은 젊은 “나이”혹은 감각의 인물이어야 한다.

이제 대학의 규범과 대학 바깥의 규범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들뢰즈는 1992년 <통제사회에 관한 단상>이라는 짦은 에세이를 통해, 20세기 초가 푸코가 말하듯 규율사회였다면,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통제사회라고 말한다 2.  가정, 학교, 공장, 기업마다 각각 다른 ‘규율’을 지니던 사회는 사라졌다. ‘여기가 학교인 줄 아십니까?’, ‘여기가 집인 것 같아요?’하는 꾸중은 줄어든다. 이제 모든 생의 단계들은 무너지고 성과라는 법칙만이 요구된다. 벽을 넘나드는 뱀의 사회. 물질적인 벽 역시도 사라진다. 대학 기업화라는 이름으로 거대 자본이 학교 담장을 넘고, 학생들의 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경찰은 대학의 정문을 통과한다. 국가와 자본이라는 거대 ‘도덕’은 이제 모든 생애주기적  단계들, 가정-학교-공장-기업의 도덕을 총괄하는 경찰이 된다. ‘성과’외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통제사회. ‘영주’는 대학원이라는 통제사회로 부터 이탈한다. 그 이탈은 단순한 탈-대학이 아닌 탈-조선, 탈-사회적인 공간인 수도원을 향했다. 대학원은 성과가 지배하는 다른 직업군들과 같았고(아니 더 했고), 그는 대학원생활(공부)와 불화했으며, 먼 타지의 수도원에서 (대학원에서 허락되지 않던) 사사로운 일들에 자신의 감정을 내 맡기는 일을 통해 스스로를 회복한다. 사회학 연구자 정민우가 지적하듯 오늘날 대학원생들의 서사는 “생존” 혹은 “이탈”이다 3. 영주는 이탈을 선택했다. 그리고 남은 이들 중 대부분은 시간강사라는 또 다른 불안정성의 세계로 진입한다.

 

2. 난망한 진리의 구축 #노동의 소외

 

“지난해 가을에 강사 몇 명이 대학에서 짤렸대요.

보통은 계약이 그냥 갱신되는데 이번엔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자기 그렇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 김혜진 <딸에 대하여>

 

 김혜진의 소설 <딸에 대하여> 속 딸은 대학의 시간강사다. 집안 사정이 녹록치 않았지만, 어머니는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는 지금 -동료 시간강사가 부당하게 해고 당하고, 이에 딸이 자신의 강의를 내려놓고 함께 연대하고 항의할 때- 후회한다. “어쩌면 딸애는 공부를 지나치게 많이 했는지도 모른다.”하고. 해고된 동료 선생은 ‘동성애’에 관한 것을 가르치다고 잘렸다고 한다. 아니, 왜 그런데 거들어서. 모른 체 하면서도 엄마는 알고 있다. 그의 딸은 결코 거들었던 것이 아니다. 딸은 지금 동성의 애인읆 나나고 있다. 그 애의 이름은 ‘레인’이지만, 결코 부를 수는 없다. 내 딸의 동성애인, 그 애는 언제나 그 애다. 아니 우리 애가 무엇이 못나서. 인정할 수 없다. 참 이상한 세계가 되어 버렸다.

“오늘날 일이란 행위는 모두 훼손되고 더럽혀졌다. 그것은 오래전에 우리 세대에게 자긍심과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던 역할을 잃은 지 오래다. 사람들은 이제 일의 주인이 아니고 그것에 종노릇을 하며 소외당하고 외면당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해야한다. 그리고 끝내는 일 밖으로 밀려나고 쫓겨나고 실패를 인정해야하는 순간을 맞는다.”

-160page

 사실 엄마는 알고 있다. 딸이 “학교가 그 사람들을 내쫓았어. 한마디 말도 없이 파리 쫓듯 내쫓았다고.”하고 말할 때(105p), 그것은 딸의 세계 속에만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20세기 초의 <스토너> 속 주인공의 부모는 농부다. 씨 뿌리고, 수확한 것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그는 그의 일의 주인이다. 그러나 간병인인 <딸에 대하여> 속  엄마는 그의 직장에서 매일같이 경험한다. 그는 이제 일의 “종노릇”을 해야한다. 그가 겪는 것은 일-노동-으로부터의 소외다. 딸 역시도 그렇다. 엄마는 딸 아이가 처한 불안정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내 부모가 내게 했던 것처럼 열심히,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말을 딸애에게는 할 수 없다.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어 버렸다.”(31p)고. 사정 모르는 이들이 ‘교수님’ 딸을 두었다고 부럽다 말하지만, 내 딸은 파리 목숨 시간강사다. 계약서 한 장 쓸 수 없다. 노동과 무관한 일로부터 해고를 받는다. 소설 속 ‘엄마’가 처한 현실과 정확히 일치한다. “나는 간병인 파연업체에 소속된 사람이고 내 업무를 평가하고 일을 더 시킬지 말지 결정하고 월급을 주는 것 모두가 그 업체의 소관이다.”(58p)

 가족은 노동으로 소외받는 이들의 한 묶음이지만,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다. 오늘-여기의 도덕이 성과라면, 가족은 이 성과를 이룩해야하는 -경영해야하는- 하나의 단위다. 후기 자본주의의 불안정성 속에서 이제 자식의 교육은 이윤은 없고 손실이 큰 ‘짐’이다. 죽은 주인공의 아버지는 그녀를 줄곧 “돈 먹는 하마”라고 불렀다. 손실만 남는 이 투자는 가족의 책임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계속된다. ‘학자금 대출’은 이같은 현실에서 가족을 채무자주체로 만드는 하나의 장치다. 문화 연구자 천주희는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하는 물음을 던졌다. 그가 내린 답 중 하나는 오늘날 대학 교육과 학자금 대출이 체제의 유지를 위한 통치성이 작동하는 거점이라는 것이다. 모녀 사이의 휴머니즘은 이 통치성을 위해 활용되고, 소설 속 ‘딸’과 ‘엄마’ 사이 복잡한 문제들은 줄곧 ‘돈’이라는 다른 것으로 전도된다. 돌아서서 ‘아, 그게 아니었는데’ 후회하면서도 계속. 이제 가족으로부터의 불안정성, 고용으로부터의 불안정성, 더불어서 이 소설에서는 성(gender)적인 불안정성으로 인해 소설 속 공부를 사랑하던 인물들은 공부와 불화한다. 딸은 강사직을 내려놓고 투쟁한다. 엄마는 간병일을 그만둔다. 역설적으로 그들을 각각 소외시킨 이 노동에서 해방된 뒤, 둘은 대화한다.

 

3.

공부와 불화하는 시대 #”프로”지만 또 다른 프로professor는 될 수 없는  

분명 태초에 그것은 사랑이었다. 사랑은 공부하는 이들을 대학원으로 이끌었다. 지속성과 충실성이 있다면, 그 곳에서는 “진리”의 “구축”이 가능했다. 20세기 초반이 배경인 소설 <스토너>에서 우리는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공부가 아닌 모든 것과 불화했던 인물은, 언제나 공부로 부터 위로를 받았다. 책을 읽고, 다시 쓰는 일을 진실한 노동. 공부가 아닌 모든 것들과 불화하면서, 그는 위악스러운 사람이 되었지만 우리는 스토너에게 숭고함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스토너는 어떤 하나의 사랑-공부에 대한 사랑-에서 진리를 구축했다.

 

그리고 오늘-여기의 소설들은 이것의 불가능함을 증언하다. 이제 대학 스스로의 법칙이 설 자리는 없다. 가정-학교-기업 사이의 벽은 허물어지고, 모든 것은 성과라는 기준을 통해 재단된다. 최은영의 단편소설 속에서 보이듯, “모아둔 돈”과 “학위”는 등치된다. 대학원은 교수가 될 야망이 있는 이들만 가야하는 곳이 된다. 공부와 대학’으로’ 도망쳤던 스토너와 달리, 오늘날 대학원생들은 대학’으로부터’ 도망친다. 최은영의 소설 속 영주가 이탈한 인물이라면, 여전히 남아있는 이들은 시간강사가 된다. 이들은 김혜진의 소설 속에서 드러나듯 파리 목숨의 불안 속에서 일한다. 해고에는 예고가 없다.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는 대학 바깥의 인물인 엄마가 처한 현실과 꼭 빼닮았다.

 

“졸거나 스마트폰을 만지는 학생을 적당히 모른 척하고, 무례한 질문에 놀라지 않으며, 관계보다 실무에 더 신경을 쓰는 사람이 됐다. 어쩌면 프로야구 선수, 프로골퍼 할 때 ‘프로’강사에 가까워졌다 할까.”

-김애란 <풍경의 쓸모>

김애란의 소설 속 팔년 차 시간강사 정우는 말한다. “관계보다는 실무”가 우선이다. 프로professional은 profess에서 파생된 단어다. 그 어원은 앞에서(pro-) 말하다(-fess)이지만, 오늘날 프로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가급적이면 많은 일들에 침묵할 수 있는 능력이다. ‘침묵하는 사람’이라는 거꾸로세워진 ‘프로’의 정의를 충실히 따르자. 그래야만 또 다른 프로-교수professor-가 될 수 있다. 정우는 입을 꾹 다물고, 학과장 곽교수가 저지른 교통사고를 뒤집어쓴다. 모두가 스스로를 ‘중심’으로 알고있는 대학의 활기 속에서 이들의 존재는 가려져 간다. “이 고장, 저 고장으로 강의 나가기”에 선택의 여부는 없다(158p).  고속버스를 타고 강의를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 창 바깥의 풍경이란 서울의 그것과 아주 다르구나. 벌판, 해가 지고 또 뜨는. 그 주변을 오가면서 정우는 깨닫는다. 아! 나는 “중심”이 아니구나. 내가 얼마나 “중심”에 익숙해져 있었던가. 정우는 그가 더이상 중심이 아님을, 점점  더 중심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대학 -혹은 사회-의 주변, “풍경의 일부”다.

 공부외의 모든 것과 불화했던 이. 그리고 공부와 불화했던 이. 둘 사이의 거리는 멀어 뵈지만 실은 아니다. 대학에서 진리를 구축할 수 있었던 1930년대 미국의 소설 속 주인공 <스토너>는 대학 기업화 전의 끝물을 살았던 인물이다. 1960년대 이후 ‘기업가 대학’이라는 모델은 스토너의 배경인 미국에서 출발해 다른 나라들로 수출된다. 창의-창조-앙트프레너쉽(기업가정신)이 최고의 가치인 한국 대학 역시 미국식 모델의 수 많은 변이형 중  하나다. 오늘-여기의 소설은 대학, 학문, 공부와 사랑에 빠지고,  이를 통해 진리를 구축하는 일의 불가능성을 말한다. 이제 공부를 사랑하는 이들은 풍경-배경-이다. 대학원생만의 문제일까. 2017년 하반기 서점의 매대에 김애란, 최은영, 김혜진의 소설이 보여주는 정서- 답답함, 갑갑함, 복잡함, 난망함의 사중주-가 대학원생이라는 이름을 통해 현현되는 이유는 무얼까.

 “프로’강사'”pro가 되어야 하지만 교수professor는 될 수 없는 사람들. 공부와 사랑에 빠진 인물들이 겪는 불안정성은 오늘-여기 독자들이 일상에서 가장 가깝게 느끼는 감정이다. 노동하지만 노동자로 불리지 못하는 사람들. 견고한 모든 것들이 무너져내린 사회. 공부와의 불화를 말하는 이야기로부터 지속성과 충실성이 허락되지 않는 사회를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Notes:

  1.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2010(2009). «사랑 예찬Élodge de l’amour». 조재룡 옮김. 도서출판 길
  2. Gilles Deleuze (1992). Postscript on the Societies of Control, October. 59. pp. 3-7.
  3. 정민우 (2013). 지식 장의 구조변동과 대학원생의 계보학, 1980~2012. 문화와 사회, 15, 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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