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혐오 발언의 영역

| 海

 

  최근 대학가의 주된 관심사로 떠오른 문제를 꼽자면 역시 혐오 발언이 아닐까 생각한다. ‘혐오에 몸살 하는 대학…’과 비슷한 뉘앙스를 가진 타이틀을 단 기사들을 요근래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혐오 발언에 대한 이론은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으나 일상 속 만연한 혐오 발언의 존재를 깨닫고 심각성을 제시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일베, 소라넷, 메갈, 퀴어퍼레이드 반대 집회 등 우리는 현재 ‘혐오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도처에 깔린 다양한 혐오 발언을 접한다. 메신저 단체 채팅방에서 무차별적으로 성적 희롱과 혐오 발언을 남발했던 ‘대학교 단톡방 사건’이 뜨겁게 이슈화되고 다양한 이들의 고발이 터져 나왔던 것이 당장 오래 지나지 않은 작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강의실 내에서든 외에서든 공과 사의 관계없이 누군가의 입을 통해 다양한 혐오 발언을 듣는다.

 올 한 해 중앙대학교 내에서도 혐오와 차별이 가시화된 많은 사건들이 존재했다. 학내에서 당장 기사를 통해 공론화되었던 사건들만 살펴보아도 누군가의 고의에 의해 쓰레기통에 대량으로 폐기되었던 여성주의 교지 ‘녹지’와 정치국제학과 내 페미니즘 소모임인 ‘참페미’가 써 붙였던 대자보가 또다시 테러를 당한 일이 있었다. 또한 세월호 희생자와 위안부 피해 할머니, 중국인 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비하했던 ‘막말 A교수’의 혐오 발언 사건과 그리고 최근에 발생한 중국인 유학생의 혐오 발언을 담은 낙서가 있었다.

 지난 시월 말, 학교 곳곳에는 중국인 유학생과 관련한 혐오 발언을 규탄하는 총장의 대자보가 붙었다. 지난 24일 대학원 건물 306호와 2층 여자 화장실에 쓰여 있던 중국인 유학생 및 중국 국가주석 비하 발언을 한 학생이 신고했으며 사건을 접한 총장이 관련 성명서를 써 붙인 것이다. 해당 대자보는 ‘외국인 학생을 향한 혐오 발언은 범죄’라는 것과 ‘대단히 심각한 인권침해 행위’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엄중한 경고 및 처벌을 예고한 것으로 혐오 발언에 대한 총장의 제재가 직접적으로 이루어진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혐오 발언을 규탄하는 총장의 대자보를 읽으며 막연히 혐오 발화자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 개인의 잘못으로 지적하고 처벌하는 것으로 해결점을 내리는 것이 최선인지, 또한 혐오 발언의 생산 과정에서 학교는 자체적인 책임을 배제하고 심판자의 위치에서 판결을 내릴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단순히 한 개인이 발화한 언어가 곧바로 타인을 상처를 줄 만한 힘과 의미를 가지고 그 순간 바로 기능하는 것이라면 해당 발화자를 처벌하는 일이 가장 즉각적으로 혐오 발언 생성에 제재를 가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혐오 발언의 연구자 주디스 버틀러는 혐오 발언의 작동 기저에 대해 역사성을 언급하며 설명한다. 버틀러의 주장에 따르면 여성 혐오, 인종 혐오, 동성애 혐오 등 갖가지 혐오를 어우르는 말은 단지 발언자 개인이나 특정 집단 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종 차별적 욕설은 언제나 다른 곳으로부터 인용되며, (…) 인종 차별 발언은 주체로부터 기원하지 않는다.”(주디스 버틀러, <혐오 발언>, 157.) 버틀러는 혐오 발언은 다른 곳으로부터 인용하여 사용되는 것이며 발화하는 주체가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혐오 발언은 그 자체로 인용이며 발화 가능한 주체에게 혐오를 휘두를 수 있고 해당 발언으로 상대를 귀속시킬 수 있는 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혐오 발언의 권력은 혐오 발언자의 범위를 초월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한 혐오 발언자가 “빨갱이 새끼”라 내뱉는다 해도 그 단순한 단어가 진리로 고정되고 권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빨갱이”라는 단어 속에는 남북전쟁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사람을 규정하고 구분하며 억압하고 잔인하게 학살한 역사가 퇴적되어 있다. “빨갱이 새끼”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일축된 잔혹한 역사성이 한 개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면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단어는 오랜 세월 축적되고 다양한 이들에게 반복 인용되면서 혐오 발언으로서 존재한다. 사실상 개인은 단순히 혐오 단어를 인용하는 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버틀러가 혐오 발언자가 단순 인용자라고 주장했다 해서 그것을 사용하는 이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담론에 대한 인용 가능성은 담론에 대한 우리의 책임감을 증대시키며 강화시킨다고 주장”한다. “혐오 발언을 발언하는 자는 그런 발언이 반복되는 방식에, 그런 발언을 재활성화시킨 것에, 혐오와 상처의 맥락을 재확립시킨 것에 책임이 있다.”

 언어는 종종 미끄러진다. 주체가 생각하고 떠올린 바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온전히 전달하기란 텔레파시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약간의 단어 선별과 뉘앙스의 차이로 주체가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변질될 수 있으며 언제나 오독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말은 발화자의 의도를 벗어나 타인에게 고통과 상처를 제공한다. 항상 언제든지 변질 가능성을 지니고 고의든 아니든 누구에게나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이 언어이다. 언어의 단적인 특성으로 연결되는 이 다분한 불안정성에 따라 우리는 일생에서 단 한 번도 타인에게 타격을 주는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의 발언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한 개인 내에 깊숙하게 자리 잡은 일련의 발언들이 별 의식 없이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데에 대한 자각이 없을뿐더러 자신의 무식함과 무례함을 당당히 전시하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

 한편 이런 혐오 단어를 인용하는 것에 불과한 단순 발화 개체에 혐오를 휘두르는 힘을 제공하는 것은 다름 아닌 국가법이다. 법은 혐오 발언을 판단하는 과정에서 해당 발화에 의미를 부여하고 반복 인용을 가능하게 한다. 법과 관행에 남겨진 혐오 발언이야말로 한 개체가 지속적으로 참고하고 반복해서 인용 가능한 역사적 퇴적물이기 때문이다. 법적 규제와 처벌이 가능하기 위해 혐오 발언의 범위와 혐오 발언의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국가는 혐오 발언을 자의적이고 편파적으로 해석한다. 또한 “혐오 발언 문제를 결정하는 법은 추가적이고 반동적인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일관되지 않게 적용”(주디스 버틀러, <혐오 발언>, 83.)되곤 한다. 그렇기에 버틀러는 이러한 국가를 혐오 발언 재생산의 주체로 본다. 단순히 혐오 발언을 인용한 한 개체에게 책임을 가한다면 혐오 발언에 퇴적된 역사성을 미처 고려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국가법의 폭력성이 은폐된다.

 논란이 된 이번 사건과 나란히 놓고 보면 학교 역시 혐오 발언이 된다는 판단을 내린 후 법적 규제를 가할 것을 예고했다. 국가적 기관인 학교가 법을 적용하기 위해 이것이 혐오 발언이라는 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통해 혐오 발언을 정의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혐오 발언 해석에 대한 학교의 자의성을 의심하며 학교가 정한 법적으로 보호받는 표현과 그렇지 못하는 표현 간의 간극을 쉽게 메울 수가 없다. 학교의 자의적 판단 하에 제재가 가능하고 불가능한 표현을 구분하는 데 있어 그 어떤 이념도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학교 역시 혐오 발언을 생산하는 주체라는 지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참고

주디스 버틀러, 유민석, <혐오 발언>, 알렙,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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